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 나눔의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개관 15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그 기념식에 함께 하기 위해서 익숙하지 않은 운전솜씨로 네비에 의지하여 경기도 광주에서 퇴촌 쪽으로 약 8킬로 거리에 위치한 나눔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마치 하늘은 금일 기념식 행사의 분위기를 아는 듯 연신 눈물과도 같은 비를 하늘이 맑아지도록 쏟아내고 있었다.
퇴촌면 원당리 초입에 위치한 나눔의 집은 생각보다 멀지는 않았다. 도로 위 우측에 위치한 나눔의 집 표지판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나눔의 집이 위치하고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개관 15주년 기념식'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개관 15주년 기념식은 나눔의 집 야외 광장에서 열렸다. 10일 오전 10시경 시작된 기념식에는 나눔의 집 대표 송월주 스님, 안철수, 이한성, 노철래 의원, 조억동 광주시장, 최성 고양시장, 카사이 아키라(Kasai-Akira) 일본 중의원, 이성규 광주시의회장, 임승업 안전보건공단 교육홍보이사, 이을죽 경기도청여성가족국장, 강정민 여성가족부복지지원과장, 김정숙 여성아동폭력중앙지원단장, 도상현 ㈜위비스 대표이사, 이완규 인터라이프 대표외 후원회원들 및 자원봉사자, 학생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묵념, 축사, 고 김화선 할머니 흉상 제막식, 후원 협약, 다문화 사랑패 공연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기념식은 묵념 뒤 축사로 진행되었다. 안철수 의원은 묵념뒤 기념식 축사에서 "위로를 하러 왔다가 더 많은 위로를 받았다"며 "성찰과 반성이 없는 국가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며 일본의 반성을 거듭 촉구했다. 이어 할머니들의 이름을 한분씩 말씀하며 "아픈 역사를 기억해 되풀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약속하겠다. 힘이 돼 드리겠다"며 축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행사 내내 숙연한 얼굴로 할머니들과 함께 하였다.
그 뒤 아키라(공산당) 일본 중의원은 "역사적 사실을 용기있게 전한 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며 "식민지 범죄에 대해 일본 정부는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행사 내내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뒤이어 조억동 광주시장 및 다른 참석자들의 축사가 진행되고 난후 고 김화선 할머니의 흉상 제막식이 진행되었다.
제막식 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참가자들뒤이어 시작된 제막식에는 사람들의 커다란 박수와 함께 거행되었다. 날씨는 고 김화선 할머니의 삶의 고통의 시간들을 기억이라도 하는지 눈물 같은 빗물로 나눔의 집 야외광장을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빗물은 사방으로 흐르고 넘쳤다.
제막식 후에 포토타임이 어느 정도 끝나고 정리되자 참석자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뜨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아직 제자리에 그대로 계셨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참석자들이 자리를 뜨는 와중에도 할머니들에게 거듭 일일이 인사를 하며 퇴장하고 있었다.
관성의 효과인지는 몰라도 다른 일반 참석자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순간 기념식 사회자의 '아직 행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는 장내 멘트가 나오기까지 했다. 장내는 어수룩해지고 있었지만 야외 광장은 다시 다문화 사랑패의 사물놀이 공연이 진행 준비되고 있었다.
그와중에도 비는 더욱 굵어지다 못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누군가에게 화를 내듯 빗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몸이 불편하셔서 먼저 부축을 받고 들어가신 할머니 외에는 그 시점에도 할머니들은 아직 제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다문화 사랑패의 공연은 기운이 넘치고 흥이 타올랐다. 공연이 막바지로 갈수록 비는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사랑패의 공연은 무사히 잘 마무리 되었으나 야외공연이 힘들 정도로 폭우가 계속 쏟아져 나머지 행사는 생활관으로 옮겨 진행되어 마무리되었다.
폭우로 인해 야외마당에서 고 김화선 할머니의 흉상을 뒤로 하고 생활관으로 옮겨가는 도중이었다. 고 김화선 할머니 흉상을 지나가시면서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분과의 추억을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고 연신 터지는 플래시에 눈이 부셔 친구와의 이별을 잘 마무리 못하시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할머니는 그냥 고 김화선 할머니의 흉상을 거칠고 주름진 손으로 쓰다듬기만 하시는 분도 계셨다.
일본인들의 묵념기도... 우연히 보게 된 '위안부' 전시관할머니들이 다 지나가시고 난 후에 몇몇의 일본인들이 고 김화선 할머니의 흉상 앞에서 고개 숙이며 무엇인가를 기도하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무슨 인사를 드렸던 것일까? 그 속마음은 모르지만 그들의 표정과 기도하는 자세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전해졌다. 적어도 가식적인 악어의 눈물이 아니라는 것을…….
기념식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화장실을 찾다가 우연히 전시관으로 잘못 들어서게 되었다. 의도한 방문은 아니었지만 밖으로 나가기 위해선 전시관을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게 전시된 사진과 기록물품들을 보게 되었다. 촬영금지 구역이라 눈으로만 보고 나와야 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할머니들이 겪으셨을 고통이 전해 옴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 커다란 고통을 견디셨던 것이었을까? 무엇이 대체 이분들을 이토록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한 것인지…….
이런 고통의 상처가 그저 역사의 한 줄의 기록에만 남는 것일까? 란 여러 가지 생각이 가슴을 후벼 팠다.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사과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일본은 아직도 변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있음이 아직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에 가슴이 먹먹할 뿐이었다.
광장 중앙 바로 뒤편에 보면 먼저 가신 할머니들의 흉상이 모여져 있는 곳이 있었다. 위안부 소녀상 앞에서 다들 주름이 가득하고 우두커니 한곳을 응시하시는 듯한 모습으로 모셔져 있었다. 마치 그분들 뒤에 있는 소녀상을 뒤로 한 채 그분들이 한창 즐겁고 행복했던 자신들의 소녀시절의 모습을 보고 그리워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돌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시는 듯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돌아갈 수 없음을 알면서 그 시절을 향해 가슴으로 응시하는 듯한 모습은 가슴 아픈 슬픔의 모양이 되어 내게 전해졌다.
며칠 있으면 대한민국 광복 68주년이다. 우리나라가 해방이 된 지 반백년도 훨씬 넘은 68년이나 되었다. 하지만 아직 그 시대 위안부 소녀상에 얽힌 역사의 상처에는 해방이 아직 오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다가올 8·15일 광복절에도 할머니들의 가슴에는 진정한 해방이 오려는 지는 미지수이다. 아니 오히려 대한민국은 해방이 왔지만 그분들의 가슴에는 해방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를 한다고 해도 그분들의 그토록 원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본이 진심어린 사죄를 한다면 할머니들의 상처는 조금이라도 치유가 되고 할머니들의 고통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수 있을 것이다.
※ 참고
고 김화선 할머니 : 1926-2012 평안북도 평양출생,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활, 충남 조치원에 정착하여 집안이 어려운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캄보디아에 우물파주기, 국제평화인권센타 건립을 위해 전 재산을 기증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함. (나눔의 집 정보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