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이 가깝다. '마' '암' '초' '등' '학' '교' 칠이 군데군데 벗겨지기도 했지만 아직 이름 선명하다 벌써 40여 년 전 코흘리개 '아이'가 교문 사이로 보이는 저 넓은 운동장을 근심스럽지 않게 시소도 타고 공차기도 하며 쏘다녔을라나 문득 먼 과거로 한참, 구형 프린스를 멈춘다 그때 엄마는 지금 나보다 10년은 더 젊으셨지 - 이상옥의 디카시 <코흘리개 아이>방금 초등학교 동기 배판조에게 전화로 물어보았다. 베이비부머 세대인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동기가 모두 몇 명이었냐"고. 대답이 "송반, 죽반 두 반이었는데, 한 반에 60명이 넘었던 것 같다"고. 초등학교 동기가 120명은 족히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당시 초등학교 교가에 "학우 1천명"이라는 구절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2004년, 고성 마암 시골집(고향집)에서 마산의 직장에 출퇴근하면서 디지털카메라 하나를 구입하여, 인상적인 풍경을 찍고 그 풍경이 불러주는 말을 덧붙여 '디카시'라는 즐거운 실험을 막 하던 때였다. 그때 어머니 나이는 77세이고, 나는 48세였다. 그 당시 쓴 디카시 중 한 편이 <코흘리개 아이>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60년대는 전교생이 1천명이나 될 정도였으니 엄청 큰 초등학교였다.
1955~1963년생 소위 베이비부머 세대. 이 세대는 전쟁 이후 출산붐을 타고 태어나 1970년대부터 산업화의 주역으로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해온 것이다. 나는 1957년생으로 전형적인 베이비부머 세대이다. 내 고향 마암면 장산리만 해도 동네가 늘 시끌벅적할 만큼 아이들로 넘쳐 났다.
요즘 시골마을은 내 고향뿐만 아니라 어디든지 아이들 만나기가 쉽지 않다. 현재 마암초등학교 전교생이 20명이다. 학우 1천명이던 초등학교가 20명이니,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이럴 때 적확하다.
시골집 옆에 바로 장산교회가 있다. 동네 아이들은 대부분 교회 주일학교에 다녔다. 그 당시에는 유치원도 없었고, 학원 다닐 일도 없었으니, 교회 주일학교의 재미 있는 프로그램은 당연 인기였다. 그래서 신앙의 유무를 떠나 그냥 유치원 다니듯이 교회 주일학교를 다녔다. 크리스마스 무렵이나 여름성경학교 때에는 특히, 아이들로 넘쳐났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회 주일학교가 폐쇄되었다. 아이들이 없으니, 어찌 주일학교가 운영되겠는가. 지금 모교회인 장산교회도 노인 몇 분만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근의 중학교까지 다니고는 대부분 산업역군으로 도시로 진출했다. 물론 학업으로 도시에 간 경우도 있지만, 당시 대학생이 면 단위에서 몇 명이 없던 때였으니, 공장 등의 산업현장으로 갔다고 보면 된다.
어느 시골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내 고향에도 노인분들만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젊었다고 해야 50대다. 이러니 교회 주일학교가 폐교되듯이, 마암초등학교의 미래도 불투명하기만 하다.
그래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요즘 귀촌, 귀농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희망을 걸어본다. 꼭 시골에서 농사를 짓지 않아도 인근 마산이나 통영 진주 등지에 직장을 가진 분들이 내 고향 마암면 같은 곳에 전원생활하면서 출퇴근하고, 아이들을 시골학교에서 교육시켜도 좋을 듯하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조그만 교실에서 거의 60명 이상 수업을 하던 때와 비교해보면 지금의 교육환경은 너무나 좋다. 시골학교는 미니학교여서 더 알찬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식 있는 부모들은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이제는 채호석 교수가 쓴 『 청소년을 위한 한국현대문학사』(두리미디어, 2009)에 새로운 시문학의 한 장르로 소개되어 있을 만큼 대중화되었다. 디카시는 스마트폰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날시)을 순간 포착(영상+문자)하여, SNS 등으로 실시간 순간 소통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