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몸이 먼저 느끼는가 보다. 열대야에 지쳤던 몸이 선선한 바람에 새 기운을 얻고, 몸이 새 기운을 얻자 비로소 정신도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다.
올가을은 짧을 것 같다는 일기예보를 들으며, 아직 온전히 오지도 않은 가을이 아쉽게 느껴진다. 가을은 빛깔이 가장 다채로운 계절이다. 봄 빛깔이 연록이요, 여름 빛깔이 초록이요, 겨울 빛깔이 하얀색이라면, 가을의 빛깔은 여느 계절보다 다양하다. 그 빛들은 하나같이 장엄하고 농익은 빛깔들이다. 내 삶 어느 언저리 어딘가에는 저렇듯 농익은 진지한 빛깔이 들어있으면 좋겠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맛을 다 보며 살아간다. 단맛, 쓴맛, 신맛, 매운맛, 짠맛이 고루고루 섞여 있는 것이 삶이다. 나이에 따라 그 어떤 맛이 더 강할 뿐이다. 20대까지의 삶이 단맛이라면, 40대까지의 삶은 쓴맛도 보고 매운맛도 보고 짠맛도 보는 삶이 아닐까? 50대 이후의 삶은 신맛?
그래서일까? 오미자를 마시면서 느껴지는 맛들이 나이에 따라 다르다. 지난여름 더위에 지치면 아내가 오미자를 타 주었다. 그 맛 가운데 쓴맛이 유독 많이 느껴졌다. 40대에 쓴맛을 제대로 보지 못해 50대에 삶의 쓴맛을 보는 중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문득했다.
나는 메밀꽃이 좋다. 메밀국수는 별로 좋아하질 않지만, 작은 꽃이 어찌 그리도 화사한지, 붉은 꽃술은 입술만 붉게 화장한 아낙을 보는 듯하다. 요염한 여인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을 메밀꽃에서 느낀다.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랐을 때, 메밀꽃밭을 보면 소금을 흩뿌린 듯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런 상황에서 메밀꽃밭을 바라본 적은 없다. 그런 날도 살다 보면 있겠지.
가을빛은 울긋불긋하기 마련인데 오로지 순백색으로 자기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만 같은 메밀, 그래서 가을빛 중 백미를 꼽으라면 메밀의 순백색 꽃과 어우러진 요염한 붉은 꽃술을 선택하겠다. 한 가지만은 아니고, 이 둘의 조화를.
가을 햇살에 잘 말라가는 태양초를 보면 늘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여름부터 붉은 고추를 따는데 장마철에는 밖에 말릴 수가 없으니 군불을 땐 방에 고추를 말린다. 장마철의 눅눅함은 없어 좋았지만, 고추의 매운맛과 짓무른 고추에서 나는 냄새가 싫었다.
백열전구 아래서 종일 밭에 나가 일했던 어머니가 가위를 들고 고추를 다듬는다. 고추 시앗은 따로 모아 기름을 짠다 하시고, 제대로 잘 마른 것들은 팔거나 친지들에게 나눠준다고 정성껏 따로 모은다. 우리가 먹을 것은 상·중·하 중에서 하품이다. 검은빛으로 말라버린 것들이거나 짓물러 여기저기 도려낸 것들이 우리의 몫이다.
"좋은 것 좀 먹자"고 하면 "빻으면 다 똑같아!" 하시던 어머니, 그래도 국수에 고명 얹을 실고추는 가장 색깔이 예쁜 것으로 하셨다. 가을 빛깔 중에서 고추처럼 붉은빛은 없는 듯하다. 그 어느 단풍잎도 고추만큼은 아니다.
유홍초는 작은데 무척이나 단단한 꽃이기도 하다. 그 단단함이라는 것은 '나팔꽃이나 메꽃에 비하면'이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말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무더운 여름 줄기와 이파리만 내고 있다가 선선한 바람이 불어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면 비로소 피어나기 때문이다.
가을이 오면 제법 밤에는 춥다. 이불을 끌어안고 자야 할 즈음이면 군불의 느낌이 좋을 즈음이면 유홍초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렇게 작은 꽃이지만 강인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가을이 시작되었음은 가을빛을 간직한 것들이 하나둘 알려준다. 이 가을에 나는 내 삶에서 어떤 빛깔을 뿜어낼 수 있을 것인지, 그럴 것이라도 있는지 돌아본다.
덧붙이는 글 | 2012년 9월 초 강원도 물골에서 담았던 사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