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자전거 여행 셋째 날, 대마도 최남단 쓰쓰자키까지 다녀와서 대마도 종단을 마무리할 것인지, 편안하게 이즈하라를 여행할 것인지를 두고 의논하다가 여유로운 이즈하라 시내 여행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대마도 관광 안내 자료에 나오는 대마도의 주요 관광지는 대부분 이즈하라 인근에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국인들이 관심을 갖는 덕혜옹주봉축기념비, 조선통신사비, 고려문, 최익현 순국비 등이 모두 이즈하라 시내에 있고, 쓰시마민속박물관이나 하치만구 신사, 가네이시 성터, 오후나에와 같은 쓰시마 관광지들도 이즈하라 주변에 있습니다.
물론 국가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시라타케를 비롯한 섬 곳곳에 있는 여러 곳의 자연공원 등도 둘러보고 싶었고 온천욕도 하고 싶었지만,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오전 나절 동안 다녀올 수 있는 곳은 없었기 때문에 이즈하라 시내만 둘러보는 여유로운 계획을 세웠습니다.
슈젠지와 최익현 순국기념비
이즈하라 시내에서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최익현 순국기념비가 있는 수선사였습니다. 둘째 날 오후에 이즈하라에 도착하여 숙소를 확인한 후에 이른 저녁을 먹고 해가 떨어지기 전에 자전거를 타고 수선사를 갔었지요.
슈젠지는 이즈하라 시내에서 자전거로 5분쯤 걸리는 주택가 한 복판에 있었습니다. 최익현은 일본과의 통상을 반대하다가 흑산도에 유배되고 단발령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을 일으켜 4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관군에 맞섰으나 순창전투에서 패전하고 체포되어 쓰시마에 유배되었습니다.
쓰시마에 유배된 최익현 선생은 끝내 살아서는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1907년 1월 1일 생을 마감하였으며, 그의 장례가 치러진 곳이 바로 슈젠지라고 합니다. 최익현 순국기념비는 1986년이 되어서야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400년 전 모습 고스란히 간직한 선착장 오후나에
이즈하라 시내 여행 두 번째 방문지는 '오후나에'입니다. 오후나에는 이즈하라 시내에서 24번 지방도로를 따라 구타방향으로 5km쯤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는 불과 10분 거리입니다. 구타로 진입하는 입구 다리 위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공원 같은 곳이 있는데 바로 오후나에입니다.
오후나에는 1660~1663년에 만들어진 쿠다항 하구에 있는 다섯 개의 선착장이 있는 부두 건축물입니다. 지금도 1663년에 쌓은 돌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정문, 창고, 수리소 등의 건물과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조선통신사가 타고 온 배도 이곳에 정박하였고, 대마도주를 비롯한 권력층들이 이용하는 쓰시마번 공용선 선착장이었다고 합니다.
대조선무역항으로 번성하였던 1700년 전후에는 연간 80회 이상의 무역선 출입이 이루어졌다는데 400여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선착장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바다와 강물이 만나는 곳에 있는 오후나에는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고 깨끗한 물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침에 숙소에 배낭을 맡겨놓고 자전거를 타고 나와 가장 먼 곳에 있는 '오후나에'를 찾아 나섰는데, 예상보다 훨씬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점심 때 마트에서 구입한 도시락과 간식을 싸들고 다시 한 번 오후나에를 찾아가 바람이 잘 부는 시원한 다리 밑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도 한 숨 잤었답니다.
퍼즐조각처럼 딱 맞춘 일본식 정원 세잔지
세 번째 방문지는 '세잔지'였습니다. 조선통신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 세잔지는 높은 돌축대 위에 자리잡은 아담한 절집입니다. 우리나라 절집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깨끗하고 정갈한 정원이 인상적입니다.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유스호스텔로 사용중이라고 하는데, '세잔지'(서산사)라는 이름 때문에 여전히 절집인 줄 알고 왔습니다. 세잔지는 골목 안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찾는데 잠깐 어려움이 있었지만, 주변 골목에도 에도시대의 풍경이 남아 있어 골목길을 이리저리 다니는 것도 또 다른 재미였습니다.
세잔지의 아름다운 정원은 '가레산스이' 양식의 정원이라고 합니다. 모래로 물을 큰 돌들은 산을 상징하는데, 돌표면 문양으로 물의 흐름을 표현한다더군요. 마치 퍼즐 조각을 딱딱 맞춰 놓은 것처럼 나무와 돌과 건물이 모두 원래부터 있어야 할 자리에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더군요. 쓰레기는 고사하고 먼지도 한 톨 남기면 안 될 것 같은 정갈함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네 번째 방문지는 조선통신사의 비, 덕혜옹주 결혼봉축비, 가네이시 성터였습니다. 조선통신사비와 고려문은 쓰시마역사민속박물관 바로 앞에 있습니다. 덕혜옹주 결혼봉축비와 가네이시 성터는 쓰시마민속박물관 뒤편에 있습니다. 한낮 가장 더운 시간에 에어컨이 있는 쓰시마민속박물관을 둘러볼 작정으로 오전에 박물관 주변을 차례로 둘러 보았습니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덕혜옹주의 삶은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덕분에 더 많이 알려졌는데, 조선 제 26대 왕 고종의 막내딸인 덕혜옹주는 1925년 일본에 끌려갔다가 1931년 쓰시마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와의 결혼을 하고,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한 뒤 1962년 귀국하게 됩니다.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실어증과 지병으로 힘겨운 삶을 살다 198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베스트셀러 소설로 남아 있습니다. 이곳에 세워진 봉축기념비는 1931년 다케유키와의 결혼을 기념하는 비석입니다.
덕혜옹주의 남편 소 다케유키는 국내에 알려진 것처럼 난폭하고 무식한 사람은 아니라고 합니다. 동경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로서 대마고등학교 교가를 작사 작곡하였고, 대마도지에 시를 기고하였으며 유화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결혼이 당시 한일관계에서 비롯된 강제 결혼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 결혼봉축비는 두 사람의 이혼으로 없앴다가 부산-대마도간 선박 취항이 시작되고 한국관광객이 늘어나자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이라고 합니다.
가네이시성터 뒤쪽에 있는 반쇼인은 역대 쓰시마번주와 그 일족을 모신 곳으로 일본의 3대 묘지 중 한 곳인데 1인당 300엔씩 입장료를 내야해서 그냥 되돌아 내려와 성터와 덕혜옹주결혼봉축비만 둘러보았습니다. 덕혜옹주봉축기념비가 있는 가네이시 성터 입구에는 2층으로된 제법 웅장한 '누문'이 있습니다.
대마도는 조선통신사 유적지...
이보다 훨씬 소박한 고려문은 쓰시마민속박물관 마당에 있습니다. 고려문은 이즈하라의 옛성문인데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만든 문이라 '고려문'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수백명의 조선통신사 일행이 이 문을 거쳐서 이즈하라 성내로 들어갔을텐데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는 아주 초라한 모습입니다.
'고려문'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일부러 보러 갈 이유가 없어보이는 문입니다. 고려문 바로 옆에는 조선통신사비가 있습니다. 대마도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한국 관련 유적들은 조선통신사와 관련이 있는 장소들입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10년 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고 합니다.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300~500명에 달하는 조선의 문화사절과 같은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당시 대마도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국제 교류였던 셈입니다. 이 비석 역시 다분히 한국 관광객을 의식한 비석이라고 볼 수 있는데, 1992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다음 방문지는 한국인을 위한 관광 안재 자료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하치만구 신사'입니다. 고대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는 진구황후(神功皇后)를 모시는 신궁입니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진구황후 모시는 하치만구 신사
진구황후는 제14대 중애천황(仲哀天皇)의 황후(皇后)이자, 제15대 오진천황(應神天皇)의 어머니이며, 임신을 한 몸으로 삼한(三韓)을 정벌하였다는 것이 일본측의 주장입니다. 289년부터 389년까지 101살을 살았다는 신화적 기록이있고 임신한 상태에서 혼자 신라를 정벌하였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고니시 마리아를 모시는 신사도 있습니다. 고니시 마리아는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의 딸이인데, 대마도 번주였던 소오 요시토시와 정략적 결혼하였다가 전쟁 이후 소박을 당했다고 합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를 모시는 신사가 있다는 것이 납득이 잘되지는 않았습니다.
이곳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포탄들이 유물로 남아 있고, 태평양전쟁 전몰자 추모비도 세워져 있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일본의 침략 전쟁을 기념하는 유적지라고 볼 수 있는 유쾌하지 않은 장소입니다. 거대한 '도리이'가 우뚝 서있는 이즈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신사입니다.
기분 좋은 장소는 아니지만, 높게 자란 큰 나무들이 시원한 나무그늘을 만들어 주고 나무 그늘 아래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는 까닭에 한 여름 자전거를 타고 온 여행자들의 더위를 시켜주는 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는 진구황후를 모신 신사에 한글로 또박또박 소원을 적어 놓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쓰시마 민속자료관
이즈하라 시내 관광의 마무리는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입니다. 대마도는 나가사키현에 속하는데 이 민속자료관은 나가사키현립 시설로 1978년에 개관하였다고 합니다. '조선통신사 두루마리 그림'을 비롯하여 문화재, 역사자료, 민속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소장품은 조선통신사 두루마리 그림이지만, 부산에 설치되었던 '왜관 그림도', '조선통신사 접대 상차림 글미도'등 재미있는 소장품이 많이 있습니다. 쓰시마 민속자료관은 한반도와의 문화 교류 흔적과 옛 대마도 사람들의 생활상을 살펴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또 쓰시마 야마네꼬(산고양이), 쓰시마 사슴, 물수리 등 천연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쓰시마 사슴 박제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한 낮 더위를 피하면서 찬찬히 민속자료관을 둘러 볼 계획이었지만 예상보다 전시물이 많지 않아서 천천히 살펴보도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낮 12시가 되기 전에 이즈하라 시내 여행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대마도는 일본 본토에서 130여km나 떨어져 있지만 부산에서는 불과 4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이즈하라 주변만 둘러봐도 한반도와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국경의 섬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겠더군요.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데 맞서 대마도를 우리땅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대마도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보면 일본이 분명합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대마도가 우리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독도 문제 해결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마지막 날 왕복 50km쯤 되는 쓰쓰자키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려던 계획을 취소하는 바람에 다음에 대마도 여행을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마도가 작은 섬이라 자전거로 2박 3일이면 종단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여행 일정을 너무 짧게 잡은 것이 후회가 되더군요. 혹시 자전거로 대마도를 여유롭게 여행하실 분들은 일정을 좀 더 넉넉히 잡으시면 좋을 듯합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8월 8일부터 10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대마도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제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