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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윤혜(15·가명)가 교실로 들어온다. 윤혜는 사교육을 받을 형편이 안 되는 아이다. 조손 가족인 윤혜네는 수입이 거의 없다.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일을 못하시기 때문이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사교육은 먼 나라 이야기다. 윤혜와 처지가 비슷한 다른 아이들이 속속 교실로 들어온다. 조용하던 교실이 어느새 시끌벅적해지며 활기를 되찾는다.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아래 배나사) 고양교육장(경기도 고양시 백석 흰돌사회복지관 내 소재)의 수업 시작 전 모습이다.

겉으로 봐서는 일반 학원과 다를 바 없이 보이는 이곳은 '교육 나눔'이 이뤄지는 장소다. 방과 후 사교육을 받을 수 없는 저소득층 아이들이 교육을 받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배나사는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나눔을 위해 이준석(29)씨가 2007년 비영리로 결성한 단체다. 배나사는 여덟 곳(서울 5개소·경기 2개소·대전 1개소)에 교육장을 두고 있는데 그중 하나인 고양교육장은 특별하다. 배나사의 다른 교육장과는 달리 지역 사회복지관과 연계해 교실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수업도 지역 사회복지관과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진행된다. 특이한 점은 한 반에 여러 명의 교사가 있다는 것과 수업이 끝나는 시각이 일정치 않다는 점이다. 5명의 교사(정교사 1명·부교사 4명)가 10명의 아이들을 지도한다. 학생 두 명당 한 명의 교사가 붙는 셈. 그 덕에 뒤처지는 학생 없이 반을 이끌어가며 생활지도까지 할 수 있다. 수업은 일주일에 두 번, 하루에 약 4시간 동안 진행된다. 선생님들은 우스갯소리로 "시작 시간은 있어도 끝나는 시간은 없다"고 말한다. 개개의 학생이 40문제를 모두 풀기 전까지 교사도 학생도 집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활발해지는 교실... 아이들은 문제풀이에 열중

 배나사 고양교육장 강의 모습
배나사 고양교육장 강의 모습 ⓒ 배지훈

출석을 부르고 수업이 시작된다. 이날(9월 3일)은 '경우의 수'에 대한 수업이 진행된다. 정교사 선생님이 강의를 시작한다. 부교사들은 아이들 틈에 앉아 질문을 받고 수업 진행을 돕는다. 40분가량의 강의가 끝나자 문제를 풀 시간이다. 갑자기 교실이 활발해진다. 수업을 지루해하던 학생들도 문제풀이에는 열심이다. 못 풀면 집에 갈 수 없다는 것을 학생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선생님을 찾고, 선생님들은 분주히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돕는다. 부교사 선생님이 문제를 제법 잘 푼 지현(가명)을 칭찬을 해주자 "당연하죠, 쌤, 저 천재라니까요"라며 미소를 짓는다.

아이들이 배나사 고양교육장에서 공부하면서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이곳 대표교사 김인영(23) 선생님은 "처음에는 덧셈 뺄셈도 잘 못하던 애들였는데, 지금은 문제를 곧 잘 풀어요"라며 "개인적으로 다음 학기가 기대되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수업 중 가르쳐 준 내용으로 심화문제까지 풀어낸다. 이쯤 되면 지현이가 천재라고 넉살을 부리는 게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다.

선생님들은 교육뿐 아니라 아이들의 정서적인 측면에도 도움을 줬다. 지역 사회복지관에서 배나사 담당업무를 맡은 최현수(27)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의 문제는 능력이나 근성 같은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 환경적인 문제가 커요. 특히 그런 아이들 가정의 공통점은 집에서 부모가 제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아무래도 부모가 신경을 못 쓰거나, 편부모거나, 조손 가정이 많으니까요. 여기서 아이들은 학습적인 것 외에도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정서적인 도움을 많이 받아요. 집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롤모델을 '배나사' 선생님들을 보고 찾기도 하고요. 처음엔 반항적이었던 아이들도 자기들에게 누가 관심이 있는지 아니까. 점점 수업도 잘 듣고 그래요."

'가장 값진 것을 나눈다'는 사람들

 배나사 고양교육장 배움터(강의실)
배나사 고양교육장 배움터(강의실) ⓒ 배지훈

배나사 고양교육장은 저소득층 학생들 교육의 좋은 본보기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방과 후 방치되기 쉬운 아이들을 보호한다. 또한 민관이 힘을 합쳐 교육·정서 문제·간식·캠퍼스 투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이들에게 혜택을 제공한다.

이런 교육장을 운영하는 데 돈이 많이 들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단다. 27명의 선생님과 33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세 학급을 유지하는 데 고양시가 교육장에 들이는 예산은 한 해 130만 원 정도(장소 제공 제외)다. 아직은 작은 규모지만 앞으로 저소득층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통해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교육이 오히려 장벽이 됐다'고들 말한다. 또한 당면한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해결이 최우선이라고 외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고양교육장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결코 여유가 있어서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2012년 전국 중학생 기준 사교육 참여율 70.6%, 월 평균 사교육비 27만6000원인 현실에서 소외되는 학생들을 위해 움직인 것이다. "우리가 가진 가장 값진 것을 나누어 줍니다"는 게 배나사의 모토다.

오후 10시가 가까워 진다. 아이들은 다행히도 제시간에 문제를 모두 풀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돌아가고, 선생님들은 교실을 정리한다. 선생님들의 얼굴에 힘든 기색이 읽히기도 했지만, 표정은 다들 밝다. 방금까지 왁자지껄 했던 교실에 불이 꺼진다. 배나사 고양교육장의 하루는 이렇게 끝나간다.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고양 교육장#배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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