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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겉그림 〈소-울 플레이스〉
책겉그림〈소-울 플레이스〉 ⓒ 청어람미디어
내게 생명력 넘치는 자리는 어디였을까? 27살 늦깎이 대학생활을 보낸 전주대 도서관이지 않았을까? 그곳에 꽂혀 있던 잡다한 책들을 다 읽고야 말겠다는 그 다짐을 한 곳 말이다. 정해 놓은 책상도 의자도 없었지만 그 시절의 그 어느 지점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또 하나 신성한 자리가 있다면 어딜까? 아마도 군 생활을 유쾌하게 그러나 조금은 냄새나게 보냈던 인분차 안이지 않을까? '보안 69호'라 별명붙인 그 차를 몰고 나갈 때면 연대 경계병들조차 붙잡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사통과였다.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책들을 즐겨 읽었다. 수많은 책 속의 사건들을 통해 간접경험을 하도록 도와 준 그곳은 내게 자유도시였다. 그 인분차 안에는 다른 부대에서 빌려오거나 가져왔던 책들이 나란히 누워서 '5분 대기조'를 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내 품에 안기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한창훈 외 13인이 쓴 <소-울 플레이스>는 그들 각자의 영혼이 생동감 있게 머물렀던 자리를 되새김한 이야기다. 어떤 이에게는 내 경우처럼 도서관이나 헌 책방이 그곳이기도 하고, 다른 이에게는 이국의 낯선 호텔방이, 또 다른 이에게는 독일의 쾰른대학 그 지하 창고가 그곳이기도 했다. 저마다의 사유와 심상 속에 깊이 각인된 곳곳의 장소는 그들 모두의 영혼을 새롭게 던진 신성한 제단같은 곳이었다.

"미술에 올인, 음악은 올킬을 외친 지 10년이 지난 터였다. 유학 초기에 거금 250 마르크를 주고 구입한 히타치 레코더에 테이프를  넣고 트는 순간 나를 무력과 미몽의 사슬로 포박했던 고질 우울증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갑자기 학문에 대한 뜨거운 갈증이 솟구쳤다. 신기한 변화였다.."(94쪽)

성경 속에 등장하는 예수가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반말하는 게 영 시건방지다고 생각했다던 '노성두'. 그런 그가 독일어 성경에는 예수와 베드로가 서로 반말로 탁구치듯 하는 사실에 반하여 즉각 독일의 쾰른으로 미술사에 뼈를 묻으리라 유학길에 올랐다는데. 그런데 심장이 터질 정도로 연구에 연구를 몰입했는데도 도무지 논문이 써지지 않던 무력감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이상은의 <담다디>가 그 심령과 손가락을 일깨웠다고 한다.

그러니 그에게 '소울 플레이스'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그곳이지 않겠는가. 하인리히 뵐플린 교수를 만나게 해 준, 쾰른 대학의 가시덤불 무성한 뒷마당을 지나 녹슨 자물쇠가 덜렁거리던 그 고고학 건물의 반지하 철문 안쪽 지하 창고. 그곳이 그에게는 가장 생명력 넘치고 포근한 자궁이지 않았을까?

그 밖에도 이 책은, 소설가 한창훈에게는 잡초만 무성했고 벽에는 이끼가 촘촘한 어린 시절의 시골집이, 70세 까지도 <GQ>의 편집장으로 일할 거라는 이충걸에게는 그 낯선 이국의 호텔방이, 청담동과 신사동에서 셰프 생활을 시작했다는 박찬일에겐 이탈리아의 그 주방이, 신성한 생명의 자리임을 일깨워 준다.

누군가,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고, 말했던가? 그들 각자에게 각인된 생동감 넘친 그 장소들도 실은 기록과 함께 또 다른 생각거리들이 다가올 것이다. 전후 관계가 분명하지 않을 땐 펜 가는 대로 그저 내맡기면 될 테니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두 가지 생각이 밀려든다. 하나는 전반부 인생 속에서 살아 온 나의 신성한 장소요, 다른 하나는 앞으로 인생 후반부에 맞이할 신성한 자리를 발견해야 한다는 게 그것이다. 앞선 부분은 이미 글로써 정리해봤다. 남은 것은 후반부 인생의 신성한 자리다.

어쩌면 그 자리는 지금의 위치 속에 주어진 자리이지 않나 싶다. 다가올 미래는 늘 현재와 함께 밀고 오는 법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 주어진 자리를 생명력 넘치는 자리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먼 훗날 내 인생을 퇴고할 무렵 또 다른 '신성한 자리'가 될 테니 말이다.


소울 플레이스 - 죽어도 좋을 만큼 가슴 뛰게 하는 내 인생의 마지막 한 곳

이기웅 외 지음, 강(2012)


#한창훈 외 13인이 쓴 〈소-울 플레이스〉#내 영혼이 머문 자리#이상은의 '담다디'#독일의 쾰른대학#5분 대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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