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일 박근혜 대통령의 베트남 국빈 방문을 앞두고, 베트남 정부의 행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이하 외노협) 소속 회원단체 20여 명은 5일 오후 2시 삼청동, 주한 베트남 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베트남의 이주노동자 출국 전 보증금 예치 제도가 외국인력 제도 20년 퇴행을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박 대통령 베트남 방문에 즈음한 요구'라는 제목의 기자회견문을 통해 베트남 정부가 최근 내놓은 출국 전 귀국 보증금 예치 제도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출국 전 귀국 보증금 예치 제도는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으로 오는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1억동(약 520만 원)을 귀국 보증금으로 예치하도록 하는 것으로 지난 8월 25일 발표되었다. 우리나라 고용노동부가 베트남 출신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많다는 이유로 베트남과의 고용허가제 양해각서 갱신을 거부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다.
외노협은 이 제도가 '현대판 노예제도'라고 비판 받던 산업연수제와 다를 바 없다고 강력 반발하며 제도 철폐를 위해 나설 것임을 밝혔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발생을 막겠다며 이주노동자에게 귀국보증금을 예치하도록 하는 것은 현실성도 없고, 이주노동자의 고통만 가중시키는 조치라는 것이다. 외노협은 이날 기자회견이 끝난 뒤 주한 베트남 대사관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귀국 보증금 예치하라 하고, 귀국하지 말라는 베트남 정부
출국 전에 귀국 보증금을 예치하라는 것은 과도한 송출비용을 줄여서 송출비리를 근절하겠다는 고용허가제 도입 취지에도 맞지 않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줄이겠다는 목적도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산업연수제도가 시행될 당시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용허가제 갱신 조건으로 송출국으로 하여금 고액 귀국 보증금을 책정토록 하는 것은 외국인력 제도의 퇴행이며,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다. 제도의 퇴행으로 인한 모든 책임은 고용노동부가 져야 할 것이라고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들은 밝혔다.
기자회견에서 규탄발언에 나선, 인천외국인노동자센터의 박경서 대표는 귀국 보증금이 역설적이게도 귀국을 막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베트남 정부가 자국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미등록을 선택하는 이유에 대한 전수 조사 결과, 베트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근로계약 만료 후의 한국 고용주들의 권유가 가장 큰 원인이었는데, 귀국 보증금 예치가 미등록 방지 대책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근거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상담을 통해 확인하는 바로는, 귀국 보증금을 미등록이 되었을 때 지불하게 될 벌금으로 생각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최소 반 년 이상을 더 체류해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이어 규탄발언에 나선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의 이재산 소장은 "베트남 대사관은 귀국을 위해 여권을 연장하려는 자국 국민들에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돈을 요구하고, 여행증명서 발급조차 해 주지 않는다"면서 "그런 나라에서 귀국 보증금을 예치하라고 하고 있다, 귀국 보증금을 예치하라는 것은 결국 부패한 관료들의 잇속 챙기기에 다름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출국 전 귀국 보증금 예치, 산업연수제 답습
한국과 베트남은 고용허가제에 따라 2004년 인력수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지금까지 베트남 이주노동자 7만 명 넘게 고용허가제로 입국했다. 그런데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근로계약 만기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미등록으로 남는 비율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베트남 정부가 미등록 감소를 위한 조치로 귀국 보증금 예치 제도를 만들었다. 이 제도에 의하면, 이주노동자는 합법적으로 근로 계약을 이행하고 일정에 맞춰 귀국하면, 출국 전 예치한 귀국 보증금 1억 동을 돌려받을 수 있다.
베트남은 고용허가제로 입국하는 국가들 가운데 제도 운영과 관련한 비리 문제로 인해 가장 많은 송출비용을 내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2006년 6월 이주인권연대 베트남 현지 실태 조사에 따르면,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은 출국하기 위해 1인당 평균 1만 2천 달러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정부의 지속적인 송출 절차와 비용 간소화 요구에도 불구하고, 2012년 10월, 국가인권위 어업이주노동자 인권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인당 송출비용은 1266만 원으로 나아진 게 없었다.
이 말은 지금까지 1인당 1200만 원이 넘는 송출비용을 감당해 왔던 노동자들이 앞으로는 그 돈에 520만 원을 더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술적으로는 1800만 원 정도의 금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2년에 걸친 송출 중단으로 출국하려는 이주노동자들이 상당 부분 적체된 만큼, 비리가 만연한 송출 구조에서 이주노동자들의 부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런 식의 귀국 보증금 예치는 과거 산업연수생 제도에도 있었다. 송출업체들이 미등록자가 많이 발생하면, 송출 쿼터가 줄어들기 때문에 도입했다. 그러나 과거 산업연수제 때는 미등록자가 합법체류자보다 훨씬 많았다는 사실이 말해 주듯이, 산업연수생들은 귀국 보증금을 예치하고 출국했지만, 그 돈까지 벌겠다는 생각으로 귀국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결국 예치된 귀국 보증금은 송출업체들 잇속을 채워주는 방편이 되고 말았었다.
귀국 보증금 예치라는 강제 조항을 통해 귀국을 유도하기보다는, 송출비용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송출과정의 투명성 확보 등이 우선되어야 한다. 또한 국내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좀 더 좋은 노동조건에서 일할 수 있는 권리, 즉 사업장 이동의 자유를 허락하고, 근로계약 만기자에 대해서는 성실근로자라는 선별적 제도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재입국에 대한 우대사항 등을 두는 식으로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억압과 통제가 아닌 인센티브를 통한 귀환 프로그램 마련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줄이는 최선의 방법임을 정부는 알아야 한다고 시민단체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