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은 플라비아누스 왕조(69~98년,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상징물이다. 그래서 이를 플라비아누스 원형 경기장이라고도 부른다.
폭군 네로가 갑자기 살해되고 난 뒤 3명의 황제(오토, 갈바, 비텔리우스)가 나타났지만 이들도 곧 죽임을 당한다. 이런 살육전 속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어떤 황제보다도 그의 왕조가 안정되면서도 영속되기를 원했다.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 위에 콜로세움 세운 까닭이를 위해서는 황제의 권위와 자비를 시민들에게 동시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콜로세움은 그런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시민들이 그것을 보는 순간 그 규모와 시설에 감탄하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야 했다. 그리고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각종 투기 경기가 황제의 자비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이를 통해 로마 시민들이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고 황제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 번 상상을 해 보자. 네로 사후 민심은 여전히 흉흉했을 것이다. 이때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에 오르면서 대공사를 시작한다(기원후 70년). 공사는 초 스피드로 진행되어 10년 만인 기원후 80년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황제에 즉위하면서 완공된다. 로마 한가운데에 전대미문의 초대형 원형 경기장이 들어선 것이다. 이것은 황제가 로마 시민에게 준 선물이었다.
이제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이 엄청난 경기장에 들어와 로마 제국 최고의 인기 검투사들이 벌이는 살인 경기와 맹수 사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황제가 주는 공짜 티켓으로 들어 온 시민들이 황제의 자비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위정자들은 스포츠를 중시했다. 그것이야 말로 가장 손쉬운 체제 안정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이 콜로세움이 만들어진 위치 또한 매우 극적이었다. 바로 천하의 네로 황제의 황궁을 터로 만들었다. 네로의 도무스 아우레아는 그 명칭대로 황금 궁전이었다. 66년에 일어난 로마 대화제를 기화로 네로는 로마 시내 한 가운데에 자신의 궁전을 만들 것을 결심하고 거기에 막대한 돈과 자원을 쏟아 붓는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네로의 황금 궁전에 대해 당시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황금집 황궁의 천장은 시간을 두고 바뀌며, 그 천장으로부터 향기 나는 물보라와 장미 꽃잎이 비처럼 연회장으로 흘러내린다'고 기록했다. 네로 궁전은 한 마디로 인민의 고혈로 만들어진 폭정의 상징이자 원성의 표적이었다. 이것을 베스파시아누스가 뜯어 버리고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올 수 있는 시민 공간으로 만들었다.
콜로세움이 운영되는 과정을 연구해 보면 로마사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로마 사회는 공화정 시기이든 제정 시기이든 그 본질은 원로원을 구성하는 귀족과 일반 자유 시민(평민)의 공생 구조였다. 이 구조는 다분히 피라미드식이었는데 한 귀족이 일정 수의 평민을 물질적으로 후원하면 이들은 그 귀족의 정치적 지지자가 되어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나아가 그들 평민은 또 다시 각자 몇 명씩의 하급 평민과 후원 지지의 관계를 맺었고 이런 구조는 사회의 맨 밑바닥까지 이어졌다.
제정 시대에는 이 구조의 맨 꼭대기에 황제가 있었다. 황제는 전 로마를 수중에 넣고 있었지만 맨 밑바닥 시민까지 직접 상대하지는 않았다. 그가 관리한 것은 상층부를 구성하는 원로원 귀족이었다. 원로원 귀족과의 사이에서만 후원자와 지지자의 관계를 맺으면 그는 로마 전 사회를 통치할 수 있었다.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황제가 발권된 콜로세움 전 티켓을 일괄적으로 소수의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면, 귀족들은 자신들이 돌보아야 하는 평민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주었다. 평민들 사이에서도 부유한 평민은 가난한 평민에게 티켓을 나누어 줌으로써 가난한 평민이라도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반란하지 마라, 반란하면 이렇게 죽는다 로마인들이 콜로세움을 비롯한 제국 곳곳의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의 경기나 맹수와의 싸움을 즐긴 것을 보면 그들의 폭력성과 잔혹성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보라. <글래디에이터><칼리쿨라><스파르타쿠스> 같은 영화에서는 예외없이 로마 제국의 황제나 귀족들이 인간을 잔학하게 다루고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즐거워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수많은 문헌이 로마인의 폭력과 잔혹성을 증언한다. 콜로세움은 그것을 웅변적으로 증명하는 현물 증거이다.
로마인들의 잔혹성에 대한 유명한 일화 하나가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고문이었던 사람 중에서 베디우스 폴리오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노예 출신이었다가 자유인이 된 사람의 아들이었다. 어느 날 그는 황제를 초청한 거창한 연회를 열었는데, 집안 노예 하나가 수정으로 된 잔을 황제 앞에 떨어뜨려 깨뜨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베디우스는 집 뜰에 있던 식인 장어인 칠성장어 양식장에 그 노예를 집어 던지라고 다른 노예에게 명하였다. 그 노예는 칠성장어 떼에게 온몸을 뜯어 먹혀 죽을 판이었다. 만찬에 초대된 손님들은 노예 하나가 눈 앞에서 장어 떼에게 잡아 먹히는 장면을 지켜볼 참이었다. 그때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나서 베디우스에게 그 명령을 거두라고 명령한 덕에 그 노예는 칠성장어 밥이 되는 신세를 면했다.
로마 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노예들은 이런 사소한 이유로도 죽거나 채찍질을 당했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 집의 가장, 부인, 아이들의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로마의 이 집 저 집에서 노예들에게 채찍 갈기는 소리가 날이 새도록 들려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채찍질은 부드러운 처벌에 불과했다. 때로는 노예를 벌주고 고문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고용해서 노예를 처벌하기도 했다. 노예 주인은 노예의 생명을 박탈할 수도 있었다. 이탈리아 어느 도시에나 푼돈만 집어주면 노예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대행업자가 있었다.
기원전 61년 로마 귀족 페다니우스 세쿤두스가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때 그의 집에는 노예가 400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나이, 성별,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두 무자비하게 처형당했다고 한다. 로마인들의 폭력과 잔혹성에 대해 전문가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자 한다면 레이 로렌스의 <로마제국 쾌락의 역사>를 읽어 보시라. 끔찍한 이야기가 삽화와 함께 제공될 것이다.
로마인들의 이러한 잔혹성은 콜로세움을 채운 수만 관중의 환호성의 배경이다. 이들은 왜 이리도 폭력적이고 잔혹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공포에서 찾고자 한다. 로마는 노예제를 기초로 하는 사회였다. 로마의 위대한 건축물은 대부분 노예의 손에 의해 건축되었다. 로마에서 노예가 없었다면 로마는 유지될 수 없었다. 로마 거주민 중에서 귀족이나 자유민보다 노예는 몇 배나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인들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노예들의 반란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스파르타쿠스의 난(기원전 73년)은 로마인들에게 노예들의 반란이 무엇인지, 그리고 노예 반란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준 사건이었다.
따라서 로마인들은 평상시에 노예들의 반란 의지를 미연에 막을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잔혹함으로 말이다. 깡패들의 세계에서는 지금도 통하는 이야기이지만 상대의 보복 의지를 꺾는 방법은 무자비함이라고 말한다. 한 번 누를 때는 처절하게, 두 번 다시 도전할 수 없도록 힘을 보여주어야 반격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노예 주인들은 일상사를 통해 노예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였던 것이다. '반란하지 말라, 반란하면 이렇게 죽는다'고 말이다.
고대 로마의 잔혹함, 인간의 본성을 생각한다
나는 로마인들의 잔혹사를 읽을 때마다 인간의 본성을 생각한다. 인간은 과연 이렇게 잔혹한 존재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선량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인간이 가지는 잔혹성과 선량함의 이중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이 두 개의 상반된 본성을 조절하며 살아간다. 문명화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잔혹성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인간의 선량함을 증진시켜 나가는 것이 아닐까.
인간 사회는 잔혹성을 비난하면서 그것을 적절히 통제하지만 인간 잔혹성 그 자체를 근원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면서 적절히 그 잔혹한 본성을 분출시키는 기술이다. 그게 바로 통치 기술이다.
여기에서 채택된 것이 스포츠라는 경기이고, 그 중에서도 투기 경기이다. 투기 경기는 한 사회가 동의하는 룰을 만들어 놓고 그 룰 안에서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분출시키는 장치다. 2500여 년 전 그리스인이 올림피아드에서 즐긴 각종 격투기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후예인 지금의 수많은 격투 경기를 생각해 보라. 지금도 각종 격투 경기를 보면서 광분하는 관중이 2000년 전 로마인들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격투기는 실제로 치고받고 해야 재미가 있다. 만일 격투 자체가 그저 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맨십이었다면, 관중은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더 이상 그 격투 경기를 즐기지 않는다. 그런 쇼맨십으로서는 인간의 잔학한 본성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절대적인 인기를 모았던 프로 레슬링이 그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김일의 박치기, 천규덕의 태권도가 진짜인 줄 알고 광분했던 관중이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프로 레슬링은 더 이상 존재의 가치를 느낄 수 없었다. 그날로 그 경기는 파산하고 만 것이다. 로마인들이 콜로세움에서 그토록 열광했던 것은 검투사의 경기나 맹수와의 싸움이 진짜였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인간과 맹수가 죽어가는 것을 볼 때 그들은 흥분했다.
인류사의 전쟁은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보여주는 여실한 증거다. 이것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만행, 일본군 731부대의 생체 실험, 부녀자에 대한 성노예화, 미군에 의한 원폭 투하 등등… 얼마 전 일어난 시리아에서의 민간인에 대한 화학무기 사용… 이런 인간의 잔인함은 고대 로마의 잔혹함에 비추어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아니, 그 강도로 보면 수백 배, 수천 배가 넘는 폭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