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울산지역본부가 주최한다고 해서 노동역사기행을 다녀 왔습니다. 지난 8일(일) 오전 8시 울산공설운동장에서 만나 언양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언양 집결장소인 언양읍사무소. 저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1945년 8월 15일 36년간 일본강제침탈로부터 해방된 한반도.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임시통치와 친일과 반일의 다툼. 소련군 장교 김일성과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이 남과 북의 대표로 나서면서 김구 선생의 하나된 조국건설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고 저는 역사에서 배워 왔습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미국과 소련의 전쟁이 한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로부터 3년후인 1953년 7월 27일 한반도는 38선이 그어지고 분단을 남긴채 정전협정과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그런 비석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것이었습니다. '반공공적물망비'라고 쓰여진 비석이었습니다. 뒤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억만년 가도 공산당에게는 맡길수 없는 이강산 이겨레 이기에 여기 숱한 사람들이 목숨 바치고 피흘려 싸워홨다. -중략-. 그들의 빛그리운 마음들이 모여 이 비를 세운다. 1962년 10월 31일. 울진군 반공비 건립 위원회. 대한민국 공보부 국제신보사.'우리는 다시 빨치산이 활동했다는 신불산의 한 봉우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곳 골짜기마다 펜션들이 즐비하게 많았습니다. 우리는 입구에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부산, 울산지역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30여명 모였습니다. 그날의 역사를 설명해 주실분이 소개되었습니다. <영남알프스오디세이>라는 책의 저자로 잘 알려진 배성동 시인이 신불산에서 활동한 빨치산 유격대에 대해 이야기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신불산 680고지를 올라 가 볼 것입니다. 그곳엔 유격대 사령부가 활동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산이 가파르고 험합니다. 얼마 전에도 나물 뜯던 분이 박격포 불발탄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팬션 사이 오르막으로 산길을 올랐습니다. 산길은 만이 가팔라서 힘들었습니다. 한참을 올라가니 산 허리를 빙둘러 움푹 패인 곳이 나타났습니다. 우린 그곳에서 다시 설명을 들었습니다.
"제가 신불산 주변을 20여년간 품을 팔아서 얻은 사실입니다. 신불산 유격대가 활동하던 이곳을 미군과 국군 토벌대가 나서기전 빨리 피신하라 했다고 합니다. 남아 있으면 빨갱이로 간주하여 사살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너머로 피난 했다고 합니다. 어느 만삭의 부인도 산을 넘어 다른 마을로 가서 출산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때 출생한 분도 만나 뵈었습니다. 당시 친일 경찰과 군인의 박해를 피해 산으로 가서 빨치산이 된 경우가 80%~90% 였다고 합니다.""이곳 비트는 60년 넘게 묻혀 있었습니다. 미군과 국군 토벌대가 신불산 일대에서 활동하는 빨치산을 토벌하려고 통도사, 석남사가 있는 일대 야산을 B29 비행기로 휘발유를 뿌려가며 불을 질렀습니다. 그때 산 일대가 밤낮 없이 불바다가 되었었습니다.""그땐 지금처럼 신발이 없었지요. 기껏해야 고무신이었고 짚신을 신고다녔습니다. 대부분 맨발로 다녔다고 합니다. 혹독한 겨울을 지내려면 굴을 파고 굴속에서 은둔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기회가 되면 금속탐지기를 가지고 신불산 일대에 묻혀있을 총기류나 불발탄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다시 산위로 올랐습니다. 얼마쯤 오르니 다시 수많은 비트의 흔적이 나왔습니다. 구덩이 흔적만 있고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어 평지나 같았습니다. 어떤 참석자는 쌓인 낙엽을 치워보기도 했습니다. 깨진 토기 파편이 있어 주워 보여주며 물어보니 그곳엔 그런 파편이 많다고 합니다. 빨치산의 그릇으로 사용되던 것이라 했습니다.
"이곳엔 두 사령부가 있었습니다. 산등성이마다 수백여명씩 있었습니다. 거울로 이산과 저산으로 신호를 보내 정보를 공유하곤 했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엔 친일 경찰에 붙잡혀 가느냐 산속으로 들어 가느냐 두가지 방법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엔 남정네들이 씨가 말랐다고도 합니다."그 산 주변으론 숱가마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울산 철강생산에 쓰기위해 신불산 일대 나무로 숱을 만들어 울산에 공급했다고 합니다. 다시 산을 올라 4차 비트에 도착했습니다. 아래서부터 1차,2차,3차 그렇게 비트 이름을 지정했습니다.
"이 비트 파보면 뼈가 많이 나올겁니다. 전쟁이후 마을 사람들이 증언에 의하면 이곳 산엔 뼈만 쌓여 있더라 했습니다. 빨치산이 먹을 게 필요하니 저 아래 초원에 소를 100여마리 키우면서 잡아 먹었다고 합니다. 옷이나 신발도 미군이 버리고 간 것 주워 입었다고 합니다. 산등성이로 길 만드는데 파는 곳마다 뼈무더기가 나왔다고 마을 주민이 증언 했습니다."우리는 7차 비트를 지나 남도부 사령부가 있던 곳에 도착했습니다. 지금은 산행하는 사람들 쉼터로 쓰라고 2층 팔각정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곳은 군관 학습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남도부는 본명이 하준수 였습니다. 한국전쟁 시기에 빨치산 지도자로 유명했다고 전해집니다. 1921년에 경남 함양군 마을중 천석군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진주중학교를 다니다 일본인 교사를 폭행해 퇴학당하고 곧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합니다. 일본 대학 법학부 재학중 태평양 전쟁 학병 징집을 거부하고 귀국해 친구와 지리산에 입산. 무장항쟁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지리산에는 징용,징병을 거부한 청년들이 약 300명 가량 숨어 지내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지리산에서 신불산으로 와서 사령부를 지휘 하다가 3년후 9명 정도가 남아 산을 내려가 활동하자고 결정한 뒤 활동 하다가 1954년 1월 15일 대구 도심에서 육군 특무대에 붙잡혀 55년 여름 서울 수색에서 총살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 나이 35세 였습니다.
우리는 빨치산 사령부가 있던 장소에서 점심을 먹고 파래소 폭포가 있는 곳으로 내려 갔습니다. 파래소 폭포는 빨치산 요원들이 밥도 해먹고 빨래도 하는 곳이었다 합니다. 폭포 물줄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떨어지고 있을 것이었습니다. 바뀌고 변한건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행하면서 파래소 폭포를 찾았습니다. 우리도 그들중 한부류 였습니다. 수천년 전에도 흘렀을 파래소 폭포는 오늘도 여전히 흘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60여년전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아무일 없었던 듯이 유유히 물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잠시 파래소 폭포 바위에 앉아 발을 담구며 쉬다 내려 갔습니다. 얼마쯤 내려간 곳에 절벽히 있었는데 절벽 바위에 큰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배성동 시인에게 물어보니 일행을 잠시 모이게 해서 굴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곳은 3층으로 굴이 있습니다. 일제시대 아연을 캐서 일본으로 보내던 곳입니다. 강제 노력으로 일을 시켰고 체굴하다 떨어져 죽은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나라 잃은 수탈의 흔적이 이렇게 한반도 곳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빨치산을 이데올로기로 보면 안됩니다. 빨치산이 될수 밖에 없었던 것은 45년 해방이후 미군정이 들어와 통치를 시작했고 친일 군인,경찰이 그대로 두고 반일운동 하던 사람들을 다시 탄압하기 시작해 산으로 들어갈 수밖엔 없었습니다. 친일파와 친미파가 지금까지도 기득권을 가지고 이나라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일제시대 항일운동 하던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외면하는것은 역사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라도 살아 숨쉬는 역사를 바로 배워 잊혀진 혁명가를 다시 조명해내야 합니다."북쪽에도 남쪽에도 외면당하는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의 넋이 신불산 숲에서 지리산 숲에서 태백산 숲에서 절규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일제 36년이 남긴 비극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거 같습니다. 몇 년 전 친일인명사전을 펴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항일운동 했던 분들의 인명사전도 편찬하기를 기다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