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공단이 즐비해 노동자의 도시로 불려온 울산. 노동자의 도시, 혹은 진보정치 일번지로 불려온 울산의 정치계는 지난 십수 년 간 '보수-진보' 양대 구조를 유지해 왔지만 최근 미묘한 지각 변동이 감지되고 있다.
가장 큰 요인은 지난해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를 시작으로 최근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는 국정원의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내란 음모 수사 사건이다. 이석기 의원 사태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대선 개입에 대한 규탄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판도 변화 요인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중 구도를 이탈한 시민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양대 구도에서 소외되어온 민주당이 재평가 받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각 당의 행보도 이를 말해준다. 통합진보당이 위기를 맞아 노동세력을 결집하는 사이 민주당은 서민의 실생활로 파고드는 모양새다. 여기다 '종북몰이'에 성공한 듯 새누리당은 느긋한 모습을 보이지만 커져가는 '국정원 규탄' 목소리에 안심할 수 없는 형국이다.
새누리당, 통합진보당을 '체제전복 세력이라 불렀지만..."이석기 의원 사건이 터진 후 울산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새누리당이다. 새누리당은 굳건한 보수층을 바탕으로 최근 "노동자의 도시이며 산업수도인 울산은 체제전복 세력인 통합진보당의 아지트"라며 "통합진보당에게 더는 권력과 혈세와 시민의 사랑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기세를 드높이는 듯했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오랫동안 지역에서 대기업, 강자 편향 기조를 유지하고 있고, 나날이 증가하는 비정규직과 대형마트로 인한 서민층의 분노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지경이다. 따라서 이같은 종북몰이가 전 시민에게 먹혀들지는 미지수다.
전국적으로 인구 15만여 명당 1개 꼴인 대형마트 비율이 울산은 7만여 명당 1개꼴로 많고, 2만 여명의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1만여명의 현대차 비정규직(알바 등 포함)과 4000여명의 학교비정규직 등 비정규직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들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정부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새누리당에 대한 원성이 높다.
진보정당에 실망하고 새누리당에 실망한 시민들이 민주당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특정공업지구 지정 후 인구가 급증한 울산이 '보수-진보' 이중 구도를 굳힌 건 노동자 세력 때문이다. 1987년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 시발된 노동자 대투쟁을 바탕으로 지난 1995년 민주노총이 출범한 후 2000년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이 자리잡으면서 울산 정계를 급변시켰던 것. 따라서 표심은 보수 아니면 진보로 굳어졌다.
이후 현재까지 매년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70%-진보정당 30%라는 양자 구조로 진행되어 왔고, 민주당은 의석이 하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같은 지방선거 결과는 지난 2002년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울산에서 35.27%,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11.41%를 얻은 것에 견주면 아이러니한 일로 회자된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분당사태 이후 지난해 12월 19일 치른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39.78%를 얻은데 반해 노동계 대표로 나선 무소속 김순자 후보(0.21%)와 김소연 후보(0.06%)의 저조한 득표율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울산지역 정당들 추석민심 행보도 각기 달라이런 상황 때문인지, 추석을 앞둔 각 정당들의 행보도 좀 다르다. 내년 울산시장 선거를 '무주공산'이라고 보는 새누리당은 정갑윤(중구), 강길부(울주군), 김기현(남구 을) 의원에다 김두겸 남구청장이 공천을 받기 위해 추석 민심을 훑는다는 계획이다.
이에 반해 민주당은 서민속으로 파고드는 모양새다. 올해 들어 여성당원들을 대거 영입한 민주당 울산시당은 추석을 앞두고도 여성 당원들이 민심 행보에 앞장서고 있다.
민주당은 13일 울산대공원 동문에서 '부부가 함께 준비하는 평등한 명절 만들기'라는 주제로 각종 전 굽기, 떡 만들기 등 행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또한 추석 눈앞인 16일에는 북구 호계장터에서 '재래시장을 살리는 민주당원 한가위 알뜰 장보기'로 명절 제수음식을 구입하면서 중소상인들에게 어필한다는 구상이다.
통합진보당 울산시당은 지난 9일 '노동자운동본부 결성식 및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었다. 이석기 의원 사건으로 지역 민심이 흔들리자 최대 지지세력인 노동자 세력을 재결집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최근 지역 구도에 대해 울산지역 정계 인사는 "새누리당의 종북몰이가 통합진보당에게는 치명타겠지만 새누리당 자체로서도 민심이반을 가져오는 악수"라며 "오랜 동안 보수와 진보 이중 구도가 형성되면서 소외되어 오던 민주당이 울산에서 재평가 받는 형국"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