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숙왕 원년(1314), 경주와 상주의 첫 글자를 따서 '경상도'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그만큼 상주가 컸다는 뜻이다.
물론 상주가 고려 시대에 들어 갑자기 확대된 것은 아니다. 신문왕 5년(685) 전국의 지방행정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할 때에 이미 양주(양산), 강주(진주), 웅주(공주), 전주, 무주(광주), 한주(경기도 광주), 삭주(춘천), 명주(강릉)와 더불어 9주의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였으므로 상주는 전통 깊은 거대 고도(古都)였다.
이곳은 사벌국의 영토였다. 사벌국은 신라 점해왕 때인 249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그 후 법흥왕 12년(525)에 사벌주(沙伐州)가 되었는데, 그때도 상주는 변주(창녕), 한산주(경주), 실직주(삼척) 등과 더불어 5주의 한 곳이었다.
사벌국 고토 상주, 신라 때에도 주요 거점이었다고려 말까지는 경상도 감영(요즘의 도청)이 경주에 있었다. 태조(이성계)는 즉위 첫 해인 1392년 상주목(尙州牧)에 설치했고, 그 이후 상주목사가 경상감사(도지사)를 겸직했다. 당시 상주 관할의 경상도는 오늘날의 경북만이 아니라 부산, 대구, 울산, 경남 모두였으니, 이는 상주의 당시 위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라 하겠다.
따라서 교통의 요지이자 너른 들판이 있는 상주에 예로부터 큰 못이 존재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기 42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령(古寧)가야 때에 축조된 공검지가 바로 그것이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연밥 따는 저 처자야연밥 줄밥 내 따줄게이내 품에 안겨주소잠자기는 어렵잖소연밥 따기 늦어가오상주 함창 공갈못에연밥 따는 저 큰아가연밥 줄밥 내 따줌세백년 언약 맺어다오백년 언약 어렵잖소연밥 따기 늦어간다사랑을 이루는 일보다도 더 고단한 노동의 어려움을 노래한 민요 '상주 함창 공갈못 노래', 일명 '연밥 따는 노래'를 새긴 비가 공갈못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비 앞면에는 연밥 따는 노래 전문과, 1988년 12월에 상맥회(尙脈會)가 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있고, 뒷면에는 공갈못의 내력이 소개되어 있다. '향토를 사랑하는 우리 상맥인은 향토문화의 전승과 보존을 위해 옛터에 기념비를 세운다'는 비석 취지문을 보아 상맥회는 상주 지역 문화재 애호가들의 모임인 듯하다.
하지만 '못이 많기로는 대개 남방(南方)이 성한데 그 크기로는 공검과 견줄 것이 없다(홍귀달 <명삼정기(名三亭記)>)', '남방의 못 가운데 최대(<동국문헌비고>' 등의 표현이 말해주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 남쪽 지방 최대 호수였던 공갈못은 점점 그 크기가 줄어 지금은 1만4716㎡(4460평) 안팎으로 축소되었다. 그것도 원형 보존을 위해 1993년에 가다듬으면서 키운 결과이다.
본래 공갈못은 못둑이 430m, 둘레가 8.68km, 수심이 5.6m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보다 300배 이상 컸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 말기 고종 때 18,810㎡(약 5700평)으로 줄어들었고, 1959년 오태 저수지가 완공되면서 6,600㎡(약 2000평)로 거듭 작아졌다. 물론 공갈못이 자꾸 작아진 것은 사람들이 주변을 농토로 만든 때문이다.
남방 최대 호수 공갈못, 삼한 시대에 축조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은, 사람들이 쉽게 못을 줄여 논으로 만들 수 있었던 까닭이다. 안동호처럼 산을 깎아 물을 채웠다면 거대한 호수를 줄여 논을 만들어낼 수 없다. 하지만 자연 습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실제로 공갈못은 천연적으로 생겨난 거대 자연 습지에 일부만 둑을 쌓아 만든 호수이다. 물이 얕은 둘레를 흙으로 메워 농토로 바꾸기 쉬웠다는 말이다. 공갈못의 수심이 처음부터 5.6m에 지나지 않았다는 추정도 마찬가지이다. 공갈못에서 우리는, 공룡이 살던 시대에 경상북도 전체가 거대한 호수였다는 사실을 재삼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전설은 다르다. 언젠가 가뭄이 극심한 해의 일. 못물이 거의 다 말랐을 때 사람들이 달려들어 고기를 잡았다. 그 와중에 누런 송아지처럼 생긴 물짐승도 잡혔다. 너무 커서 어떻게 들고갈 것인지 논란이 분분한 상황에, 갑자기 뇌성벽력이 터지면서 소나기가 쏟아졌다. 별안간 못물이 불어나면서 물짐승은 홀연히 사라졌다.
이 사건 이후 공갈못은 차차 흙으로 메워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지금처럼 학교 터만큼의 연꽃 늪만 남겨둔 채 거의 논밭이 되어버렸다. 그 까닭을 이곳 사람들은 공갈못 지킴이를 건드린 탓으로 믿고 있다.
공갈못에는 에밀레종 설화 또는 손순 매아 설화와 비슷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처음에 못을 만들 때 물이 너무 많아 둑을 쌓으면 자꾸 무너졌다. 그래서 못둑 쌓는 일에 참여할 수 없는 어느 집이 아들 공검이를 내놓았다. 손순이 아이를 땅에 묻으려고 했듯이, 성덕대왕 신종을 만들면서 아이를 끓는 물에 집어넣었듯이, 사람들은 공검이를 못둑에 묻고 흙을 쌓았다. 그 결과 둑을 축조하는 데 성공했다.
공검은 곧 공갈이다. 한자로 적으면서 그렇게 바뀌었다. 그렇다면 공검 또는 공갈은 무엇일까? 신채호는 가야국의 이름 '고녕'이 와전되어 공갈로 변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둑이 될 자리에 기둥을 세워 그 위로 다리를 놓은 다음 사이사이에 흙을 채우는 것을 '공글리다'라 하는데, 그 '공글'이 공갈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한다. 매아(埋兒)설화와 이어지는 어원 추적이다.
이황도 이곳 절경에 감동, 시를 써서 남겼다마지막으로, 퇴계 선생이 이곳에 와서 남긴 시 <기정십영> 중 한 편을 감상해본다.
聞道杭州十里荷 들으니 항주에도 십리 연밭 있다던데錦雲此地還如何 비단 구름 같은 이곳과는 어떠한지?無端風雨滿空至 까닭 없이 비바람 허공 가득 일더니翠蓋歷亂翻紅葩 푸른 잎 어지럽고 붉은 꽃 번득이네.萬觓明珠瞥眼撤 수많은 연밥이 별안간 흩어지니天指哀箏鬧手撾 여러 손에 애쟁이를 시끄럽도록 퉁기는 듯.須臾雨卷定千植 잠시 뒤 비 그치고 많은 연꽃 안정되니淸遠更覺天香多 멀수록 더욱 맑고 향기 높음 새삼 깨닫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