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이겠습니다. 9월, 2013년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대전충청입니다. [편집자말] |
무척이나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가을의 문턱에 접어들었다. 산과 들에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는 풍성한 가을, 추석을 맞아 실로 여름휴가 이후 오랜만에 아버지가 계신 고향 세종시로 향했다. 우리 가족의 명절은 형제나 친척들이 모여들어 시끌벅적한 다른 집과는 달리 막내동생 부부와 조카, 아버지, 그리고 내가 전부였다.
대전에 살고 있는 동생 부부가 명절준비도 해 오는 탓에 가족이 한데 모여 송편을 빚고 전을 부치는 풍경은 없다. 내 임무는 늘 그랬듯이 차례에 모실 조상님들 지방만 한지에 펜으로 쓰는 것이다.
이번 명절에는 이미 지방을 준비해 놓은 탓에 한결 여유가 있었다. 하여 그동안 여러 이유로 찾지 않았던 고향 마을을 찾았다. 2010년 추석에 마지막으로 찾았으니 꼭 3년만이다.
고향마을 가는 길에 만난 모교와 냇가... 추억도 새록새록우리가족이 살았던 세종시 반곡동(당시 충남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은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 건설지역에 포함되어 보상을 받았다. 지난 2008년부터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야 했다. 우리가족도 2008년 2월 설 명절을 마지막으로 그 해 4월 13일 고향을 떠나왔으니 고향을 떠난 지 벌써 5년이 넘었다.
지난 2010년 추석. 고향을 방문했을 당시 사람들이 떠나 마을은 텅 비어있었지만 눈에 띌 정도로 많은 가옥이 남아 있었다. 내가 살았던 집은 사라졌지만 옆집의 담벼락과 윗집에는 아직 마을 주민이 살고 있어 집 위치를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지금, 2010년 당시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가옥을 부수고, 중장비로 밀어버렸다 해도 '내가 30여 년을 넘게 살았던 내 집터 하나 찾지 못할까'생각했다.
이번에는 네 살, 여덟살짜리 조카들이 기꺼이(?) 동행해 주었다. 하긴 고향마을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조카들의 아빠,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살았던 삶의 터전을 보여주는 것도 좋은 교육이 될 것 같았다. 반 강제적으로 조카들을 차에 태웠으니 선뜻 나섰다기 보다는 억지로 삼촌 손에 끌려 왔다는 게 더 맞겠다.
고향마을로 들어가기 전 아버지와 얼마 전 고향마을을 다녀온 동생이 한마디 거든다.
"얼마 전까지 마을 중앙에 농협창고도 그대로 있고, 대여섯집이 허물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는데... 그리고 우리집 마당에 어머니가 심었던 감나무도 그대로 있고. 감나무 봐야 집터 찾을 수 있을 걸.""그래? 아무리 그래도 집터 하나 못 찾을까."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 조카들과 함께 차에 올랐다. 오랜만에 찾는 고향에 대한 향수는 설렘 그 자체였다.
고향마을로 가는 길. 어린시절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모교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은 학생수 감소로 폐교가 돼 모 재단의 연수원과 박물관으로 그 역할이 바뀌었다. 자물쇠로 채워진 교문 너머로 보이는 학교 건물과 운동장, 그리고 그네를 비롯한 놀이기구는 그대로 있었다. 학교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학창시절 동무들과 뛰어놀던 어린시절 모습이 떠올라 잠시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비록 폐교가 됐지만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건 모교가 행정중심복합도시 개발구역에 포함되지 않아 겉모습이나마 모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의 장소가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추억을 뒤로하고 다시 찾는 옛 집터. 그 길목은 한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마치 밀림처럼 길게 자란 풀들이 도로를 에워싸듯 감싸고 있었다. 고향마을 길목에서 이번에 만난 건 어릴 적 발가벗고 멱을 감았던 냇가. 반곡리와 석교리를 잇는다 하여 반석교로 이름 붙여진 냇가 역시 한동안 사람들의 왕래가 없었던 터라 생태천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맑은 시냇물에 수북이 자란 물풀들 하며 어디선가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날아든 새들의 모습 속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꺄르르 웃음 짓던 유년시절 동무들의 모습이 더해졌다.
잠시 멈춘 중장비, 마을을 삼키다
냇가를 뒤로 마침내 마을에 접어드는 길. 저 멀리 대형 굴착기 몇 대가 눈에 들어온다. 이미 농사를 짓던 들녘은 중장비에 깔려 평지로 변해버렸고, 점차 마을 중심부로 파고들 기세였다.
추석명절 탓에 굉음을 쏟아내던 대형 중장비의 움직임이 멈춰 섰지만 마을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수대의 굴착기가 조만간 고향마을을 밀어버릴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먹먹해졌다.
동생이 말한 웅장했던 농협창고도 콘크리트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이제 고향마을에는 서너 채의 가옥만이 듬성듬성 놓여 있을 뿐 사방이 허허벌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나마 마을 중앙의 교회터에 남아있는 담벼락과 담벼락 너머 알이 꽉 찬 밤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어 위안이 됐다. 마을 중앙에 차를 주차하고 내가 살던 집터를 찾았다.
그래도 아직까지 어머니께서 심어놓은 감나무가 남아있어 어렵지 않게 집터를 찾을 수 있었다. 감나무마저 사라진다면 '집터를 찾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한참동안 집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린 조카들에 이끌려 옛 교회터로 갔다. 바로 밤나무 때문.
"밤 좀 따 주세요"하는 어린 조카의 부탁에 긴 나뭇가지를 이용해 밤송이를 내리쳤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걸 보니 제법 알이 차 보였다.
어릴 적 그랬듯 가시가 돋은 밤 껍질을 두 발로 밟고 힘껏 힘을 주니 밤송이가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신기한 듯 바라보던 조카도 한번 해보겠다며 흉내를 내지만 역부족이다.
조카의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사진기를 꺼내 사진을 찍을 무렵 요란한 소리를 내려 자동차 한 대가 들어온다. 얼마 안 돼 또다시 승용차 한 대가 마을로 들어온다. 얼핏 보니 아는 이 같다. 하긴 수십 년을 한 마을에서 함께 살았으니 스쳐 지나기만 해도 누군지 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고향마을 사라질 텐데..."상대도 나를 알아봤는지 잠시 차를 세운다. 자세히보니 명절마다 만났던 동네형이다.
"오랜만이다. 어쩐 일이여?""오랜만이네요. 어떻게 변했나 궁금하기도 하고, 조카들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해서요.""나두 그려. 마을 없어지면 자식들이 아빠가 살았던 고향도 모르고 살 거 아녀. 그래서 잊어버리지 말라고 보여주러 왔네."짧은 대화였지만 대부분 마을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일 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고향 '반곡리'는 행정중심복합도시 개발 구역내에 편입될 당시 민속마을로 지정됐다. 마을의 역사는 물론 집집마다의 거주사가 자세하게 담긴 4권 분량의 보고서도 발간됐다. 인류·민속 분야 문화유산 지표조사 보고서인 <반곡리>가 집집마다 배부됐다.
한국토지공사와 국립민속박물관이 공동으로 발행한 <반곡리>는 고향마을의 2년간의 기록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지난 2004년부터 2005년까지 2년여에 걸쳐 제작됐다. 총 135가구각 호별 집의 구조, 거주사 및 주택 연혁 등이 세부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집의 전경과 내부 사진까지 실려 있어 역사자료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전 선조들의 삶을 보여주겠다며 고향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서 가슴 한구석이 메여진다.
한편, 내 고향 반곡리는 종전의 연기군 금남면 황용리·석교리·봉기리·석삼리·장재리 일부와 함께 국책연구기관 이전 부지로 개발될 예정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의 계획상 올해는 국토연구원을 비롯한 4개 연구기관이, 2014년에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등 12개 기관 등 모두 16개의 국책연구기관이 이곳으로 이전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