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혼외아들 의혹'으로 사의를 표명한 채동욱 검찰총장의 사표를 28일 수리했다. 전날 법무부가 채 총장의 혼외아들 보도와 관련한 진상조사를 마무리하고 사표수리를 청와대에 건의한 지 하루만이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대통령께서는 채 총장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으면서 본인이 조사에 응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해명하고, 의혹을 벗기를 바랐다"면서 "그러나 전혀 조사에 응하지 않고 협조하지 않아 이 문제가 장기간 표류할 수밖에 없고 검찰 수장 자리가 계속 공백 상태가 되는 상황이 됐다"고 사표 수리 배경을 설명했다.
이 수석은 또 "이렇게 되면 검찰 조직이 불안정해지고 마비 상태가 되어 중요한 국가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며 "이런 상태를 오래 방치할 수 없어 대통령께서는 법무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채동욱 검찰총장의 사표를 수리했다"고 밝혔다.
앞서 채 총장은 지난 13일 자신을 둘러싼 '혼외아들 의혹'과 관련해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감찰관을 통한 '진상규명 조사'를 지시한 직후 사의를 표명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진실 규명이 우선"이라며 사표 수리를 유보해 왔다.
금요일 오후 긴급브리핑, 갑작스런 사표 수리 건의, 왜?결국 채 총장의 사표가 수리되기는 했지만 법무부의 부실한 진상조사 결과 발표에 대해선 각계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법무부의 발표는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일과시간이 끝날 무렵 20분 전 갑작스러운 통보를 거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이날 법무부는 A4 한 장짜리 발표문에서 "혼외아들 의혹이 사실이라고 의심하기에 충분한 진술을 확보했다"면서 ▲ 채 총장이 아이 엄마로 보도된 임아무개씨가 운영한 카페와 레스토랑에 자주 출입하고 ▲ 3년 전 임 씨가 채 총장의 부인이라며 채 총장의 사무실을 찾아와 면담을 요청한 사실 ▲ 임 씨가 의혹이 최초로 보도되기 직전에 급하게 집을 나가 잠적한 사실 등 3가지를 그 근거로 제시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두 가지는 이미 <조선일보>를 통해 보도된 것이고 법무부가 진상조사를 벌여 새롭게 추가한 내용은 '부인을 자처하면서 임씨가 면담 요청을 했다'는 한 가지뿐이다. 이 역시 임씨에게 직접 확보한 진술이 아닌 제 3자의 전언 수준이다.
채 총장 측은 이미 "임씨 가게에 자주 드나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특별한 관계는 없었다. 내연 관계면 지인들과 같이 가겠느냐"라며 반론을 제기한 바 있고, 임씨의 잠적 역시 의혹의 사실 여부와는 거리가 멀다. 임씨가 채 총장의 부인을 자처하면서 면담을 요청했다는 내용도, 임씨가 이미 아들의 학적부에 채 총장의 이름을 도용했다고 밝힌 것을 감안하면 결정적인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
법무부는 "부적절한 처신이 있었다고 인정할 만한 여러 참고인의 진술과 정황 자료가 확보됐다"고 설명했지만 구체적 내용에 대해선 언급을 피했다. 사실관계를 단정하듯 발표해놓고 구체적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은 것이다. 진상조사에 착수한 지 보름 가깝게 채 총장과 임씨의 주변을 이 잡듯이 샅샅이 조사해 놓고 내놓은 결과치고는 너무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법무부 먼지떨이식 조사에도 '정황 증거'만 제시법무부는 최근 감찰팀을 부산에 급파해 채 총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다수 기업인을 접촉한 것으로 전해졌다. 채 총장이 부산에 근무할 당시 인연을 맺어온 기업인들이 차례로 법무부 감찰팀을 다녀간 것으로 알려졌다.
법무부 감찰관실은 또 서울중앙지검에 11년 전 사건 기록을 요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법무부가 최근 서울중앙지검 기록관리과에 '채동욱 관련, 증권범죄 사건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기록협조문건을 보낸 것. 지난 2002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가 수사했던 증권범죄 사건에 대한 기록을 요구한 것인데, 채 총장은 당시 대검찰청 마약과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한겨레>는 이와 관련 "당시 특수1부가 수사했던 사건에 등장하는 브로커 등과 채 총장을 엮어보려고 시도했던 것 같다. 11년 전 것까지 뒤져 어떻게든 채 총장을 욕보이겠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누가 버티겠느냐"는 검찰관계자의 발언을 소개했다.
심지어 감찰팀은 '혼외자식'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채동욱 검찰총장의 본적지인 전북 군산시를 찾아 선산 등을 둘러보기도 했다. 법무부 직원 2명은 지난 25일 군산시 임피면사무소를 찾은 뒤 면사무소 직원의 안내를 받아 채 총장의 선산 등을 둘러보고 선친들에 대한 여론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모든 정황은 법무부가 채 총장에 대한 사실상의 '먼지떨이'식 조사를 벌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법무부는 "검찰의 조속한 정상화 필요성 및 채 총장이 진상 규명에 협조하지 않고 있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사표 수리를 건의하였다"고 밝힘으로써, 혼외자식 의혹을 사실로 단정하고 사표 수리를 건의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채 총장의 사표가 수리되면 법무부는 감찰을 할 수 없게 돼 이 역시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 된다.
때문에 법무부가 예정에도 없는 발표를 통해 부실한 진상조사 결과를 내놓고 이를 근거로 사표 수리를 제안한 것은 이번 사건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인섭 서울법대 교수 "법무부가 검사들의 발등 확실히 찍어"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는 27일 법무부의 채동욱 검찰총장 감찰 결과 발표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법무부 발표 보니, 채동욱 총장이 무의혹임을 확신케 해준다. 카페 출입, 사무실 방문, 여인잠적 사실의 3가지는 전혀 '증거' 가치도 없고, 논리적 연결점도 전무하다. 양육비 몰래 지급 같은 금전거래도 없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이어 "법무부 발표대로라면, A검사가 카페/레스토랑에 자주 출입하고, 그 주인이 검사사무실에 와서 대면을 요청하면, A에게 '내연관계+자식 의혹'을 씌워 사표 받을 수 있다는 거"라며 "너희들이 법률가의 자격이 있는 거냐? 읽는 사람이 오히려 창피할 논리"라고 지적했다.
또 그는 "법무부 발표사실에 의거해 검찰총장 사표를 받는다면, 이제 검사들 자리는 파리목숨이다. 어느 여인이 검찰청사로 가서 'B검사는 나와 특별한 사이다'고 소란 잠깐만 피우면 된다"며 "법무부가 검사들의 발등을 확실히 찍었다!"고 질타했다.
"도적적 결함 의심, 사표수리 당연" - "'채동욱 찍어내기' 시나리오"채 총장 사표 수리에 관한 여야 반응은 엇갈렸다.
새누리당은 도덕적 결함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채 총장의 사표 수리는 당연한 것이라며 청와대 개입설을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태가 잘 수습돼 검찰 조직이 조속히 정상화되길 바란다는 입장을 보였다.
새누리당 민현주 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채 총장을 둘러싼 논란이 잘 수습돼 검찰 조직이 조속히 정상화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강은희 원내대변인도 "법무부의 감찰 과정에서 채 총장의 도덕적 결함에 대해 의심가는 부분이 많이 드러난 만큼 사표 수리는 당연한 수순이다"며 "이번 사태를 놓고 청와대 연루설 등을 제기하는 것은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민주당은 청와대의 사표 수리가 '채동욱 찍어내기'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배재정 민주당 대변인은 "'채동욱 찍어내기' 시나리오에 따른 것 아닌가 의심이 든다"며 "진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이런 절차가 진행되는 것을 국민이 납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진욱 부대변인도 "지난 9월 16일 김한길 대표와의 3자 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진상조사가 끝나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채동욱 검찰총장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겠다'라고 했기에, 채 총장에 대한 진상조사가 다 끝난 것인지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