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옛길박물관 앞에 '아리랑 노래비'가 새로 세워졌다. 본래 문경새재를 찾은 나그네는 제2관문에서 500m가량 더 올라가서야 아리랑 노래비를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제1관문도 들어서기 전에 새로운 아리랑 노래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노래비만 보기 위해 문경새재를 찾은 나그네라면 왕복 2시간 이상을 절약하게 된 셈이다.
새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2013년 8월 13일의 일이다. '같은 노래비를 둘 세웠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둘 다 문경새재 아리랑 노래비이지만, 모양은 물론 새겨진 내용까지도 전혀 다르다.
같은 노래를 새겼는데 어떻게 노래비의 내용이 그렇게 판이할까?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궁금할 법하다. 사진으로 감상해보자.
제2관문 위쪽에 세워져 있는 기존 노래비의 본문 부분이다. 문경새재 아리랑의 노랫말 전문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
문경 새재 물박달나무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물론 이 노래비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리랑의 근원지가 다른 곳 아닌 문경이라는 사실이다. 노랫말 속에 등장하는 '문경 새재'에 주목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래비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은 노랫말을 읽고도 비를 세운 쪽의 마음을 전혀 읽지 못한다. 노랫말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나그네들을 설득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이 노래비의 문제점을 한 가지 더 지적한다면, 노랫말이 세로로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 한글을 세로로 쓰는 것은 중국을 본뜬 발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1988년 5월 15일 '국민주 언론'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기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신문들은 한자를 섞어 쓴 세로판 지면을 발행했다. 그 이후 다른 일간지들도 가로쓰기를 하기 시작했고, 1999년 조선일보도 마지막으로 가로쓰기를 했다. 그만큼 우리의 문화적 사대주의는 길고 긴 역사를 자랑(?)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2000년에 세워진 문경새재 제2관문 아리랑 노래비가 노랫말을 세로로 새겼으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옛길박물관 왼쪽 뜰에 새로 세워진 노래비를 본다. 이 노래비는 노랫말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당연하다. 영어를 어떻게 세로로 쓸 것인가. 눈치 빠른 독자들은 여기서, 새로 세워진 이 노래비가 제2관문 위쪽 기존 노래비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대뜸 눈치챘으리라.
A-ra-rung a-ra-rung a-ra-ri--o……a-ra-rung ol--sa pai ddi-o-raMun-gyung sai-chai pak-tala-n mu…… hong-do kai pang-maing-i ta na-kan-da노래는 가로 3m, 세로 2m의 화강암에 새겨져 있다. 제목은 'Korean Vocal Music'이다. 아리랑을 그렇게 번역한 것을 보면 선의의 뜻을 가진 서양인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노래비는 고종의 외교 고문이었던 호머 헐버트(1863∼1949)가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한 것을 기린 비석이다. 헐버트는 1896년 아리랑을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채록, <조선 유기>라는 잡지에 곡과 함께 실어 서양에 알렸다. 문경시는 이 사실을 '문경새재 아리랑'이 우리나라 아리랑의 근원이라는 주장의 한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 노래비 앞면에 호머 헐버트의 얼굴 동판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노래비의 뒷면에도 그러한 인식이 밝혀져 있다. 고윤환 문경시장이 글을 쓰고, 한국서학회 이곤 명예회장이 글씨를 새긴 <문경새재아리랑비 건립 취지문>을 읽어보자.
1896년 2월 고종의 외무특사였던 호머 베자릴 헐버트 박사에 의해 발행된 영문잡지 <조선유기>에 우리의 아리랑이 서양 악보로 처음 기록되었다. 여기에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의 가사가 있어 우리나라 아리랑 기록상 그 첫 시원을 알려주고 있다.
문경새재는 모든 아리랑의 고개 대명사로 알려져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속에 눈물과 애환, 희망과 미래가 녹여져 있는 공간이다. 이에 문경새재 고개에 깃든 아리랑의 역사와 헐버트 박사를 기억하고자 이 기념비를 세운다. 이천십삼년 팔월 십오일그렇다고 문경새재에 와서 아리랑 노래비만 보고 돌아설 수는 없다. 문경새재는 이미 국가 지정 명승 32호 아닌가. 게다가 관문 또한 국가 지정 사적 147호이다. 또,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한글로만 새겨진 옛날 비석으로는 나라 안에 하나뿐이라는 '산불 됴심'도 볼 만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많은 나그네들이, 특히 자녀를 대동한 부모들까지도 편편하게 닦여진 새 길만 오를 뿐 역사와 전통이 깃든 영남대로 과거길은 걷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령원터 지나면서 교귀정까지, 다시 연속극 <왕건>에서 궁예가 최후를 마치는 용추에서 '산불됴심' 표지석까지 오른쪽 산비탈을 따라 나 있는 영남대로 오솔길은 온통 외면당한 채 쓸쓸히 잡풀에 묻혀가고 있다.
문경새재가 명승이 된 것은 아무런 역사적 의미도 없는 단순 자연경관 덕분이 아니라 역사가 서린 옛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경시가 제작한 소형 홍보물이 문경새재를 두고 '이름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길'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녀와 함께 이곳을 찾은 부모가 영남대로 옛길의 살아 있는 구간은 걷지 않고 그저 편편한 대로만 거닌다면, 멀리서 찾아오며 기대한 교육적 의미는 반감될 것이다.
생생하게 살아서 남아 있는 영남대로 과거길 숲을 걸어본다. 길 좌우로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들이 "옛날 선비들이 괴나리봇짐을 진 채 걸었던 이 오솔길에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곰곰 되새겨 보시라"고 속삭인다. 약간의 이문을 위해 팔도강산을 떠돌던 중 어느 날 새재를 넘게된 보부상의 허기진 아리랑 노래도 들려온다. 그 소리들을 들으며 지나간 생애와 앞날의 시간들을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이 문경새재를 걷는 참된 의미이다. 문경새재에서는 군자대로(君子大路)가 아니라 군자소(小)로가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