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면서 벼도 황금빛으로 익어간다. 알곡은 속이 찰수록 고개를 숙이고, 쭉정이만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가을바람에 가볍게 장단을 맞춰가며 제 세상인 듯 흔들거린다.
추수 때가 되면 알곡과 쭉정이의 명암을 엇갈릴 것이다. 지난 봄 모내기를 하셨던 할아버지는 지난 여름 이 땅에서 소풍을 마치고 돌아가셨다. 그 이후 홀로 남은 할머니는 논을 돌볼 엄두를 내지 못하시고, 농약도 한 번 주지 못하고 그냥저냥 두었단다.
그래도 할머니는 풍년이라고, 영감이 마지막으로 지어준 벼를 이번 가을에 거둘 것이라며 할아버지를 추억하고 계신다.
아직은 이슬의 흔적이 남은 논길을 걷는다. 지난 밤, 하늘의 별이 쏟아질 듯 총총거리고 바람이 잔잔하더니만 이슬이 무던히도 많이 내렸다.
볏잎에 맺힌 이슬방울 속에 청명한 가을 하늘이 들어있다. 벼메뚜기가 이파리를 많이 갉아 먹었지만, 개의치 않고 그렇게 매 순간 아름답게 빛난다. 저 이파리가 지난 봄부터 내내 햇살과 바람과 교류하며 알곡을 만들어 갔을 것이다. 낱알 한 알 속에 온 우주의 기운이 들어있단 말이 허튼 말이 아님을 본다.
벼메뚜기가 많다고 했다. 좀 잡아서 들기름에 들들 볶아 소금을 쳐서 먹으라고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아직은 이슬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메뚜기가 날진 않는다.
어릴 적에는 강아지풀이나 수크렁 줄기를 뽑아 들고 다니면서 메뚜기를 잡아 줄기에 꿰었다. 한두 줄기 그득하게 잡으면 집으로 달려와 프라이팬에 들기름이나 참기름을 두르고 소금을 뿌려가면서 메뚜기를 구웠다. 그 바삭한 메뚜기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농약이 농사에 일반화되면서 메뚜기도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아이들도 메뚜기 같은 것들을 군것질거리로 삼을 시간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메뚜기는 중국에서 수입이 되고, 간혹 안주나 뷔페 식당의 메뉴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른들에게나 기억되는 메뚜기는 점점 그 수요가 없어졌는지 여간해서는 메뚜기를 찾을 수 없다. 맛도, 예전에 논이나 풀밭에서 잡아 먹던 그 맛과 다르니 유년의 그 맛을 기억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도 애써 찾아먹지 않는다.
벼깜부기, 나는 저것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많이는 아니었지만, 깝부기를 따먹고는 새까매진 혀를 낼름거리며 여자아이들을 놀렸으니 식용이라기 보다는 자연에서 얻는 장난감 화장품 정도였던 것 같다.
맛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냥 텁텁했다는 기억밖에는. 그 맛을 떠올리기 위해 따먹을 정도의 감성도 남아 있지는 않다. 여기저기 눈에 띄기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닌 듯하다.
며칠 지나면 추수할 것이라 한다. 원주 시내에 사는 아들이 들어와 추수를 해줄 때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예년 같으면, 조금 베어서 도정을 하여 햇밥이라도 맛보았을 터인데 올해는 그럴 여력이 없었단다. 할아버지의 빈 자리가 크다.
물골에서 나와 물골 할머니의 큰아들이 살고 있는 원주 소초면으로 향했다. 그곳에도 황금들판이 펼쳐져 있다. 벼를 벨 시간이 없어 그냥 논째 넘길 예정이라고 한다.
자기가 농사를 진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팔고, 그 돈으로 다시 남이 농사지은 것을 사서 먹는 현실이 당혹스럽다. 그만큼 농사져서 남는 것이 없다는 증거기도 하고, 농사만 져서는 먹고 살 수 없는 농촌의 현실을 보는 듯하여 마음이 짜하다.
애써 거둔 고구마와 토란을 맛이나 보라며 주섬주섬 싸서 건넨다. 물골에 있는 벼는 아버지가 지은 마지막 농사이니 잘 거둬서 어머님 드시게 할 예정이란다. 심은 분은 갔어도 벼는 야속하리 만큼 잘 익었다며 올해는 풍년이라고 한다. 풍년은 풍년인데, 농사란 게 돈이 안 된다며 한숨을 쉰다.
벼를 벨 때 다시 한번 물골에 들를 수 있으면 좋겠다. 서걱거리며 베어지는 벼, 베어질 때의 풀향기, 잘 마른 벼를 탈곡기에 털며 발을 구를 때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탈곡기의 소리, 도정하여 첫번째로 지은 윤기가 자르르한 쌀밥.... 그 작은 것들로도 행복충만했던 시절은 다시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