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준금리는 인하 또는 동결을 반복하면서 저금리기조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실질금리 마이너스 시대에 어떻게 하면 안전하면서도 더 많은 이자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계실 줄로 압니다. 그래서 당사는 이번에 특판금리상품인 (주)동양 채권을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주)동양은 그룹의 가장 중심인 모기업이자 지주회사이기에 그룹의 안정성을 기반으로 발행되는 확정금리상품입니다. (주)동양 채권은 좋은금리와 안정성을 겸비한 상품이기에 시중의 많은 자금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고 경쟁률 또한 높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참고로 현재 시중은행 정기예금금리가 1년 3% 내외 수준임을 감안하면, 본 상품이 얼마나 차별화된 금리의 상품인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시리라 생각합니다…."지난 7월 초 권아무개씨는 자신의 동양증권 CMA(종합자산관리계좌) 계좌에 6000만 원이 쌓이자 그날부터 회사 직원으로부터 위와 같은 문자와 메일을 하루에 수십 통씩 받았다.
증권사 직원은 동양레저의 채권 금리가 6~7%라면서 요즘 CMA에 가입한 사람들이 다 채권으로 옮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동양증권과 동양레저 등의 지분이 순환구조로 엮어있어, 동양레저가 어려워져도 동양증권이 갚아주니 걱정 말라"고 단언했다.
권씨가 차일피일 미루다 직원의 설득에 넘어가 승낙을 하자 직원은 전화상으로 "가입이 완료됐다"고 말했다. 며칠 뒤 집으로 찾아와 확인 사인을 받아 간 것이 전부였다. 그는 지난 23일 동양의 유동성 위기설이 언론에 보도된 후 놀라 증권사 직원을 찾아갔다. 채권이라고 했던 직원의 말과 달리 권씨가 가입한 상품은 동양레저 CP 전자단기 사채 상품이었다. CP(Commercial Paper, 기업어음)는 채권보다 후순위로 사실상 부도 처리가 되면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다.
권씨는 "채권이 뭔지 CP가 뭔지 모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두 개를 혼용해 얼버무려 말해 불법으로 CP를 팔아넘겼다"며 "전화상 가입 유도, 위험성 고지 미이행 등으로 투자자가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투자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권씨뿐 아니라 이번 동양사태 피해자들 상당수가 CMA 계좌를 가지고 있었다. 또 다른 투자자 조아무개씨는 "어느 날 증권사 직원이 전화가 와서는 내 CMA에 있는 5100만 원을 묵혀두지 말고 채권에 투자하라고 말했다"며 "내 CMA에 얼마가 있는지 다 알고 있더라"고 설명했다.
조씨는 "직원은 '동양채권은 안전해 사려는 사람이 줄섰다'고 말하며 부추겼다"며 "결국 투자하겠다고 말하자 직원은 방문할 필요 없이 자신이 알아서 해드리겠다고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이어 "직원은 내 CMA계좌의 비밀번호도 묻지 않았다"며 "CMA 계좌내역과 비밀번호까지 어떻게 직원이 알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5000만 원 이하 투자자가 72%... 투기 아닌 생계형 투자자들 대부분 그는 또 "이 채권이 위험성이 있는지, 어떤 성격의 상품인지 전혀 설명도 없이 직원이 알아서 내 CMA계좌에서 돈을 빼가 투자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사태가 터지고 나서 증권사에 가보니 채권에 투자하겠다던 직원은 자신 맘대로 9월 초에 동양시멘트 CP를 구매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와 통화 내내 울음을 멈추지 않던 조씨는 "주부인 나는 채권이 뭔지 CP가 뭔지도 모른다"며 "무지한 내 탓도 있지만 투자 상품에 대해 설명하나 없이 무조건 안전하다며 위기설이 퍼진 9월에도 채권과 CP를 판 동양증권이 너무나 괘씸하다"고 털어놓았다.
결혼자금 4400만 원을 CMA에 모아왔던 또 다른 김 아무개씨도 "동양증권의 수법에 넘어갔다"며 말을 이어나갔다.
"동양은 월급통장 CMA 계좌에 잔고가 쌓이면 전화를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을 이자 6~7%에 단기 상품 권유를 합니다. 그 상품이 채권인지, CP인지 상품명도 제대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다고 하면 그게 끝입니다. 그들의 판매수법은 참으로 교묘합니다. 사인도 없고 계약서도 안 썼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무지한 5만 국민들은 이렇게 당했습니다. 피해자 5만 국민은 투기꾼이 아닙니다. 어떤 바보가 은행 이자보다 몇 프로 더 받겠다고 전세금, 학자금, 노후 생활금, 퇴직금, 결혼자금, 주택마련비용, 보험보상금을 투기합니까? 사기성 어음을 안정적이라는 거짓으로 포장하고 조직적이고 편법적인 불법판매로 인한 피해이지 절대 투기가 아닙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5일까지 동양사태로 접수된 분쟁조정신청은 모두 7396건으로 집계됐다. 신청서에 투자금액을 기재한 5952명을 분석한 결과, 이들 평균투자액은 5200만원이었다. 인원수로는 5000만 원 이하가 72.6% (4319명)를 차지했다. 높은 이율을 좇는 투기성 자본보다는 생계형 투자를 한 피해자들이 대부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김아무개씨는 4년 동안 안 먹고 안 입으며 결혼자금으로 CMA에 넣어둔 돈 7000만원을 올해 7월 동양레저 CP에 투자했다. CP가 무엇인지 잘 몰랐던 김씨는 동양그룹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직원의 말을 믿고 전화로 투자에 응했다. 그러나 동양레저가 법정관리에 들어가자 그는 증권사를 찾아가 따졌다. 직원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동양, 직접 금융시장 통해 개미 투자자들한테 돈 끌어모아
김씨는 해당 직원으로부터 "회생절차 기획안이 나오면 회생률이 50%가 될지 0%가 될지 모른다"거나 "그 돈마저도 일시금으로 받는 게 아니라 5년에서 10년 동안 나눠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게다가 "동양레저가 현재 완전자본잠식상태고 마이너스가 3000억 원 이상이며 투자부적격"이라는 말까지 들어야했다.
김씨는 "직원에게 '왜 계약 당시 설명해주지 않았냐'고 묻자 아무 대답을 안 하더라"며 "꼼꼼히 알아보지 않은 내 부주의도 있지만 동양그룹, 동양증권 담당자들은 모두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CP를 발행했다는 점이 너무 화가 난다"고 덧붙였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다른 대기업은 은행차입이 주가 되고 직접금융시장에서 보조역할을 하는데, 동양은 은행차입이 많지 않고 오히려 회사채, CP 등 직접금융시장을 통한 자금조달이 많다"고 설명했다.
직접금융시장은 은행 등 금융권이 아닌 자본시장에서 직접 조달한 것으로, 동양그룹은 7∼8%의 고금리를 제시하며 개인과 법인에게 회사채와 CP를 판매해왔다.
이어 전 연구위원은 "특히 동양은 신용등급이 낮아 기업들이 리스크 관리 때문에 구매할 수 없었다"며 "기업들이 신용등급이 낮은 동양 회사채를 구입하지 못하니까 동양은 이를 애먼 개인투자자들에게 판매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개인투자자들이 구입한 동양그룹 회사채 신용등급은 기관투자자는 투자할 수 없는 투기등급이었다.
경실련, 현재현 동양회장, 정진석 동양증권 사장 검찰 고발
한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지난 7일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과 정진석 동양증권 사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경실련은 이날 "현 회장 등이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기성 기업어음, CP를 발행해 판매했다"며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장을 제출했다고 밝혔다.
이기웅 경실련 경제정책팀 부장은 "동양은 부실 계열사인 동양시멘트(산업 자본)의 부실을 동양증권(금융)을 통해 어음을 팔아 해결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동양 사태가 재발되지 않기 위해 재벌 그룹 내 금융 계열사와 비금융 계열사 간 편법적 고리를 끊는 금산분리 강화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번 동양 피해자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증권사 직원들이 설명도 없이 임의대로 투자해 피해를 봤다고 말한다"며 "이는 불완전판매를 넘어서 사기, 횡령"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동양 노조 쪽은 동양증권이 계열사를 살리기 위해 강제로 독려했다는 주장을 하니 금융당국이 전체 사태 파악을 면밀히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