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관련 수사에서 검찰이 피의사실 공표라는 부끄러운 관행을 되살리고 있다. 시점상으론 피의사실 공표 근절을 강조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물러난 직후다.
애초 이 회의록과 관련해 제기됐던 의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이 있다'는 새누리당 주장의 진실여부였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지지층 결집을 이루는 데에 활용된 이 의혹은 국정원의 회의록 공개로 'NLL 포기 발언'이 없다는 게 밝혀진 뒤 '정상회담 회의록 실종 사건'으로 전환됐다.
'칼자루'는 국정원에서 검찰로 넘어가게 됐다. 그런데 이 사건을 수사중인 검찰이 지난 2일부터 언급하는 내용은 '없어져선 안 될 국가기록이 참여정부 때 삭제됐다'는 쪽으로 이미 기울어 있다.
이 사건 수사를 총괄하는 이진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2차장검사는 지난 2일 언론에 수사상황을 설명하면서 참여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이관된 기록물 중에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은 없다는 수사내용을 밝혔다. 또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복사해 가져갔던) '봉하 이지원(e-知園)'에서 수정본을 찾았고, 수정본에 앞서 이지원에 등재됐던 초안을 복구해냈다고 알렸다.
그런에 이 차장검사는 "회의록은 반드시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돼야 한다"면서 "이관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고 삭제가 됐다면 (문제가) 더 크다"고 강조했다. 이어 "초안 복구본과 수정 발견본은 국정원에서 보관하는 회의록 내용과 일치한다"면서도 "내용은 아니지만 차이가 있긴 있다"고 밝혔다.
참여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회의록이 이관되지 않은 점, '초안 복구본'과 '수정 발견본'의 차이가 있다는 점 등이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는 참여정부 관련자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삭제 아닌 대체' 해명에도 '국가기록 삭제' 기정사실화 이 같은 검찰 발표에 대해 참여정부 대통령 기록물 관계자들은 '초본을 보완해 완성본을 만든 것'이라고 해명했다. 회의록을 작성한 뒤 삭제한 것이 아니라 완성본으로 '대체'했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반박성 언급이 검찰에서 나왔다. <조선일보> 5일자 보도에 따르면 지난 4일 검찰 관계자는 "삭제(됐다가 복구)된 것이나 발견된 것이나 모두 완성본이지만, 굳이 얘기하자면 삭제됐던 본이 더 완성본에 가깝다"며 "초본이니까 없애도 된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면 안 되고, 초본이라는 말도 적합하지 않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관계자들이 '삭제가 아니라 대체'라고 주장한 데 대해 검찰이 즉각 반박하면서 '기록 삭제'로 규정한 것. 앞서 이진한 2차장검사가 "삭제가 됐다면 (문제가) 더 크다"고 한 걸 감안하면, 검찰은 이미 회의록 삭제 행위에 대해 사법처리 방침을 굳혔고 그 대상은 참여정부 관계자라는 점까지 암시한 셈이다.
이에 더해 검찰은 삭제 관련자 처벌 범위까지 언급하기 시작했다. 8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검찰관계자는 "회의록 삭제 지시를 받아 실행한 사람도 공범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보도는 또 '사정당국의 고위관계자'를 인용,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이 임기 말 기록물 재분류 관련 회의에서 회의록 폐기를 지시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 회의자료를 '봉하 이지원'에서 확보했다고 전했다.
참여정부 관계자들은 지난 2일부터 검찰이 '봉하 이지원'에서 복구된 '초안 복구본'을 언급하며 '삭제'라는 표현을 지속적으로 쓰고 있는 데 대해 반발하고 있다. 정상회담 회의록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회의록 초안을 완성본으로 대체하는 과정을 '삭제'라고 부르면서 여당의 '사초 실종 사건' 프레임에 맞추려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참여정부 말기 대통령기록물 이관작업을 주도했던 임상경 전 기록관리비서관은 8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하루 전 검찰 소환조사과정에서 이 부분에 문제를 제기했다고 밝혔다. 임 전 비서관은 "'(검찰이 사용하는) 삭제가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아야 내가 제대로 조사를 받는다'고 했지만 검찰은 '수사상의 이유로 말할 수 없다'고만 답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노 전 대통령이 이지원에 등재된 회의록 폐기를 지시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슬그머니 고개 드는 피의사실 공표... '근절' 다짐한 채동욱 물러나서?이번 사건과 관련해 검찰에서 나오는 언급들은 '참여정부가 없어져선 안 될 정상회담 회의록 원본을 폐기했다'는 방향으로 쏠려 있다. 관련자들에 대한 소환조사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피의사실이 공표되고 있는 것.
그러나 이런 피의사실 공표로 인한 폐해는 이미 크게 경험한 바 있다.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명품시계를 받아 논두렁에 버렸다는 오보사례를 계기로 기소 전 피의사실을 공표 관행은 근절돼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당시 검찰은 그 같은 언급이 자기 조직 안에서 나온 것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며 "'나쁜 빨대'를 색출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이 같은 피의사실 공표 관행의 근절을 누구보다 강조한 건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었다. 채 전 총장은 재임 시 검찰 내부통신망 등을 통해 "이처럼 부끄러운 과거가 되풀이 돼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책임 추궁을 할 것을 경고하기도 했다.
채 전 총장이 혼외아들 의혹 제기로 물러나자 검찰의 피의사실공표 관행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는 모양새다. 공교롭게도 이번 사건에서도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성을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