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과천 교육원길에는 국사편찬위원회(아래 국편)가 고풍스러운 한옥 기와 건물 안에 호젓하게 자리잡고 있다. 매끈하고 날렵한 선을 자랑하는 국편 기와 지붕의 처마선은 아름다운 전통 한옥의 미감을 한껏 자아낸다. 우리의 전통과 역사, 교육을 다루는 국립사료편찬기관답다.
국편이 하는 일은 다양하다. 한국사 연수와 교육의 대중화, 학술회의 및 남북협력사업 등 굵직한 일반 사업 아래 사료 연수 및 국사 전문 교육 과정, 교원 연수, 교과서 업무 등을 관장한다. 전문 역사 연구자나 국가 고위 공무원, 역사 교사들이 이곳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공부한다. 국편이 합리성과 공정성, 전문적 역량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지난 10월 1일 취임한 유영익 국편 위원장을 두고 말이 많다. 국립사료편찬기관의 장이 갖춰야 할 자질과는 거리가 먼 편향적인 역사 인식 때문이다. 지난해 그는 한 공개석상에서 후진국에서는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발언을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적을 언급하는 대목에서였다.
그 자리에서 유 위원장은 "한국 역사에 이승만만한 인재는 거의 없지 않았는가. 이승만은 세종대왕하고 거의 맞먹는 그런 유전자를 가졌던 인물 같아요"라며 노골적으로 찬양하기도 했다. '승만어천가'라고 해도 과히 어색하지 않다. 과연 그럴까.
'국민학교에서 역사교과서 파동까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는 김한종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가 썼다. 역사교육에 약간의 관심이 있는 이라면 낯익은 이름일 것이다. 2004년, 진보와 보수 진영 간에 벌어진 역사 전쟁의 신호탄이 된 금성출판사 <한국근·현대사>의 대표 저자인 바로 그 김한종 교수다.
저자는 해방 전후부터 현재까지 역사교육의 발자취를 23가지 사건별로 나누어 서술했다. 전체 체제는 해방 전후부터 1960년까지를 다룬 제1부,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제2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제3부로 구성된다.
23개의 이야기는 한국현대사의 시기 순서에 따른 역사교육을 중심으로 하되, 역사교육과 관련된 이념이나 정책, 연구에 관한 것까지를 아우른다. 또한 이들 각각의 이야기는 역사 시기를 기준으로 배열되어 있지만 독립적으로 따로 떼어 읽어도 된다. 제목만 놓고 보면 '통사'나 '편년체'를 짐작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개별적인 이야기들만 놓고 보면, 그 앞뒤 이야기와 무관하게 그 시말을 비교적 명확히 이해할 수 있으므로 '기사본말체' 형식으로 보면 무방하다.
유 위원장이 부른 '승만어천가'의 주인공 이승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책 제1부의 7번째 이야기에는 '이승만 정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변한 역사이념'이라는 표제와 '일민주의'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권력자와 정치의 도구가 되어버린 역사이념의 생생한 실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승만은 왜 일민주의를 강조했을까1948년 11월 3일, 서울 명동의 시공관에 대통령 이승만과 국회의장 신익희 등이 모였다. 대한국민당이라는 정당의 결성식 자리였다. 이 자리에서 한민당은 '일민주의(一民主義)를 당시(黨是)로 하여 모든 정치 현안을 처리하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일민주의는 단일민족주의와 비슷한 개념이다.
저자에 다르면, 일민주의는 이승만이 주창한 가부장제적 통치이념이다. 일민주의는 표면적으로는 문벌 타파와 빈부 평등, 남녀 동등, 지방 구별 등의 구습을 일소한다는 기본 원리를 내세운다. 당연히 개인의 자유도 인정한다. 하지만 국책이 정해지면 개인, 곧 국민은 이를 지상명령으로 알고 복종해야 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이 책의 118쪽에 소개되어 있다. '일민주의 이론서들에 나오는 일민주의 사상체계'라는 제목의 이 사진 맨 위쪽에는 이승만의 상반신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바로 아래에는 '일민주의(一民主義)를 만드신 어른'이라는 소개 문구와 '일민주의'가 위아래로 나란히 적혀 있다.
'일민주의'를 따라 가지를 친 세 개의 선 중 양끝 두 개의 선은 '한 핏줄(同一血統)'과 '한 운명(同一運命)'이 들어간 네모 상자로 이어진다. '국부(國父)'로 불린 이승만의 이미지에 딱 맞아 떨어지는 그림이다. 모든 국민이 이승만의 자식이 되는 단일민족국가!
저자에 따르면, 이승만이 내세운 일민주의는 초대 문교부 장관인 안호상이 본격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강한 국수주의와 반공주의로 무장한 안호상은 일민주의를 통해 학생들과 교육계의 사상을 통일하려고 했다. 학교 '사상정화' 작업도 벌였다. 학교에서 좌익사상을 가진 교사들이 추출되었고, 모든 학교에 설치된 학생위원회를 통해 좌익교사와 학생들의 행적이 당국에 보고되도록 체계를 만든 것도 안호상이었다.
안호상이 최초로 설치한 학도호국단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학도호국단은 일종의 학생 군사조직이다. 저자에 따르면, 학도호국단은 만들어질 때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독일 히틀러의 나치당이 조직한 청소년단인 유겐트와 비슷하다는 비판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호상은 그런 비판에 "유겐트라도 좋으니 우리 민족이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고 응수한다. 그런 점에서 안호상의 민족주의는 철저하고 배타적이며 이기적이다. 그런 이가 교육 수장이었다니 당대의 학교 분위기가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저자는 이승만 정부의 일민주의 논리가 용어와 외적인 형태를 조금 바꾸면서 그대로 박정희 정권에서 부활했다고 설명한다. 가령 일민주의가 강조한 '민족적 민주주의, 민주적 민족교육'은 박정희 정권의 '한국적 민주주의'로 계승된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폐지된 학도호국단도 유신 독재의 한복판이었던 1975년에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 책을 보고 있노라면 그릇된 역사 이념이나 역사 인식의 폐해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지를 여실히 알게 된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고루한 명제도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 국민교육헌장에 얽힌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제2부의 첫 번째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자.
국민교육헌장의 전신 제2경제30대 후반 이상의 세대라면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헌장)을 기억하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나도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시절에 반 대표로 웅변대회에 나가 이 헌장을 우렁차게 외던 기억이 생생하다. 초등 시절 내가 보던 교과서의 맨 앞에는 어김없이 헌장이 실려 있었다. 국민의례에서 의무적으로 낭송되기도 했다.
그런데 모두 393자(이 숫자는, 저자가 '중학교 2학년의 그 비극'으로 묘사한 일화를 통해 실감나게 소개되고 있다)로 된 헌장에는 '예비 전신'이 있었다. 이름하여 '제2경제'. 저자에 따르면 제2경제는 박정희가 국민의 정신자세를 강조하면서 만들어낸 말이었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생산, 건설, 수출 같은 것을 제1경제라고 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면의 건설이 제2경제"였다. 지속적인 경제발전은 국민의 정신자세, 즉 제2경제에서 비롯된다는 논리였다. (중략) 박정희 정부는 제2경제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조직하였다. 제2경제운동 실천 국민대회가 열리고, 각 직장에서 실천 모임이 조직되었다. (177쪽)저자는 이른바 '제2경제론'에서 볼 수 있는 국민정신의 강조가 헌장 제정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박정희 정권이 제2경제를 포함하여 헌장을 제정하고 보급하기 위해 불철주야로 기울인 노력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어떤 단어가 떠오른다. 특별히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아주 자연스럽게.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화두인 '창조 경제'가 그것. 판박이까지는 아니어도 그 기조나 추진 과정을 보면 비슷한 면이 아주 많다.
창조 경제는 박 대통령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내세우고 있는 개념이다. 사전적 의미에만 주목해서 보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경제라는 것이니 생경한 '제2경제'에 비하면 한결 구체적이다. 창조경제를 홍보하기 위해 정부가 만든 웹사이트인 '창조경제타운'을 들어가 보니(지난 9월 30일에 개설했다고 한다), 창조경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성장엔진이 되는 경제'를 가리킨단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창조경제를 어려워한다. 성장엔진이 아니라 소득불평등을 야기시킬 것이라고 독설을 쏟아내는 이도 있다. 미국 조지메이슨 대학의 타일러 코웬 교수 같은 사람이 그 예다. 아닌게 아니라 그가 예로 든 가수 싸이를 보면 고개가 끄덕거려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오해와 편견 때문에 창조경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줄기차게 항변하고 있다. 이러다가 창조경제의 의미를 확실히 해둔다고 '창조경제헌장'이나 '창조경제론'을 문서화해 모든 공공기관에 내려보내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역사교육은 단순한 과거 공부가 아니다. 역사교육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돌아보고, 함께 나아가야 할 미래의 방향을 탐색하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교육의 장은 가치와 신념, 세계관과 철학이 첨예하게 부딪힐 수밖에 없는 분야다. 교학사 역사 교과서로 촉발된 작금의 '역사전쟁'도, 그런 점에서 보면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과거의 동일한 잘못과 오류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과거에서 소중한 교훈을 얻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이유다. 20세기 역사교육사를 통해 한국현대사를 재구성한 이 책이 많은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꼭 일독하기를 권한다. 두고두고 자료집으로 써도 아주 좋다.
덧붙이는 글 | <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 (김한종 지음 | 책과함께 | 2013. 10. 4. | 500쪽 | 2만 5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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