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이 생기면 1년 감옥 가도 좋다? 47퍼센트의 고등학생들에게는 '그렇다'. 중학생은 33퍼센트, 초등학생은 16퍼센트다. 이웃의 어려움과 관계없이 나만 잘 살면 된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고등학생이 36퍼센트다. 중학생은 27퍼센트, 초등학생은 19퍼센트다.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윤리연구센터가 지난 6월부터 전국 초중고생 2만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지난 10일 발표한 결과의 일부다.
요새 아이들 탓하자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다. 아이들은 그들 주변의 어른과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거울이다. 10억 원과 1년 감옥살이를 바꾸겠다는 '합리적인(?!)' 생각은 오롯이 아이들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돈만 밝히는 뻔뻔하고 이기적인 어른들, 맹목적인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와 시스템, 갈등 조정 능력을 잃어버린 정부 등이 총체적으로 결합한 결과가 아닐까. 돈이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물신주의, 평가와 결과물에 집착하는 성과주의 사회의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1억은 월급 300만 원을 받는 직장인이 매달 그 절반을 저축했을 때(현재 우리나라의 가계저축률은 5퍼센트를 채 넘지 못한다) 5년만에 손에 쥘까 말까 한 큰 돈이다. 10억은 50년이다! 거의 평생이다. 냉철한 '현실주의' 감각에 따라 감옥 1년과 맞바꾸는 거래에 매혹당할 만하다. 하지만 인생이 그런 현실주의만으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도대체 우리 아이들이 왜 이렇게 돼버린 걸까.
10억 준다면 감옥 간다는 아이들, 뭐가 문제였을까
문제작 <스승은 있다>로 교사와 학생, 교육에 대한 신선한 통찰을 안겨준 우치다 타츠루의 <하류지향>이 몇 년간의 절판 시절을 보내고 재출간되었다. 이 책이 다루는 문제는 간명하다.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과 일하지 않으면서 성장을 거부하는 젊은 세대들. 하지만 문제 분석은 결코 간단치 않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과 동향, 교육제도, 정치·사회적인 상황 등 갖가지 요인이 얽혀 있어서다.
저자는 이 문제를 '공부로부터 도피하기'와 '리스크 사회의 약자들',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기' 등의 제목이 붙은 3개 장을 통해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마지막 4장은 이 책의 바탕이 된 2005년 강연의 대화 마당을 옮겨 놓은 것으로, 일종의 결론이다. 이른바 '성장 거부 세대'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해법을 모색하는 부분이다.
이 책에 소개되는 일본 학생·청년들의 실상은 심각하다. 텔레비전 방송에 나온 중학생이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나요"라는 질문을 해서 그 자리에 있던 평론가들이 모두 할 말을 잃었다는 사례는 상징적이다. 일부 극단적인 사례겠지만 정말 놀랍다. 10억을 감옥살이 1년과 맞바꾸겠다는 한국 학생들의 사고방식은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정도만 다를 뿐 우리나라도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는 어른들이 경제성과 합리성을 동기로 부여해서 아이들을 학습의 길로 이끄는 행태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그들은 "공부를 하면 이런저런 좋은 점이 있단다" 하면서 아이들을 실용적으로 유도한다. 공부를 하면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고, 존경받는 지위에 오를 수 있고, 높은 연봉을 받고, 수준 높은 이성을 배우자로 맞을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46쪽)저자의 말처럼, 이런 어른들은 그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대다수 교사나 부모가 이렇게 말한다. 기시감이 느껴진다. "수능 때까지 죽자살자 공부하고, 연애와 여행, 취미생활과 독서는 그뒤에 맘껏 하라"고 말하는 대한민국의 어른들이 그려지지 않는가.
"왜 공부해야 하나요"나 "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나요"와 같은 질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공부하는 것이 권리라고 말한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 항상 죽임을 당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그런데 이 질문들은 그런 권리와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한다.
저자는 아이들이 이렇게 된 데에는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고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삼십년 전 아이들은 노동을 통해 최초의 사회관계망에 들어섰다. 아이들은 부모님 심부름과 같은 자잘한 가사노동을 통해 당당한 구성원으로의 정체성을 다졌다. 하지만 요새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됐으니까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마"나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해라", "학원이나 가라" 등의 말을 듣는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능감이 넘치는 소비 주체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소비주체로서 아이들은 상거래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노련한 협상술을 발휘한다. "그건 별로 좋지 않군요. 난 그거 필요 없어요"와 같은 것 말이다.
저자가 보기에 "공부따윈 필요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하는 법. 그래서 교사와 부모는 이런저런 현실주의적인 논리를 들이대면서 "제발 공부 좀 해 줘"라고 말한다. 그때서야 아이들은 마지못해 공부를 '해 준다'.
소비 주체로 들어선 아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저자의 말을 따라가 보자. 그들은 학교를 편의점 같은 것으로 여긴다. 진정한 배움은 비가역적이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존재의 변화 과정이다. 하지만 소비 주체로 학교에 들어선 아이들은 배움의 쓸모와 현실적인 유용성을 찾으며 거래를 하려고 한다. 그 결정은 모두 자신의 것이다.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은 어떤 일의 쓸모 있음과 없음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이 바르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쓸모가 있다고 '내'가 결정한 것은 쓸모가 있고, 쓸모가 없다고 '내'가 결정한 것은 쓸모가 없다. (중략) 이 주장(자기결정 및 자기책임론)이 헐값게 미래를 팔아치우는 아이들을 대량으로 배출하고 있다. (83쪽)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저자는 자기결정권을 신봉하는 이들이 리스크 사회에서 약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유 때문일까. 저자에 따르면, '금테를 두르고 태어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무수한 후원자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에 속해 있다. 그들은 자기결정권을 버린 대신 그 네트워크의 돌봄을 통해 상층의 삶을 용이하게 보장받는다.
사회적 약자는 정확히 그 반대다. 저자는 이들을 극단적으로 말해 상부상조 조직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로 규정한다. 그들을 보살피고, 위험을 낮춰줘야 하는 국가나 가족 등 공동체도 그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저자는 그들이 벌거벗은 개인으로 고립무원인 사회에 맞서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 모든 것은 자기결정에 따른 자기 책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배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면 아이는 배움을 거부한다. 이것이 자기결정이다. 배우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리스크를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사칙연산을 못하고, 알파벳을 모르고, 한자를 못 읽는다. 흥미 있는 영역에 대한 사소한 지식은 있을지라도 흥미가 없는 분야는 아예 모른다. 벌레가 파먹은 듯 의미의 구멍이 숭숭 뚫린 세상이 별로 불쾌하지 않다는 듯 살고 있다. 이렇게 아이들은 계층 하강의 리스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115쪽)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느긋하지 못한 이유'니트(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라는 말이 있다. 영국 정부가 노동정책상 인구 분류로 정의한 용어로, '일할 의욕이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공부와 노동으로부터 도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 이른바 니트족이다.
자기결정과 자기책임, 개인의 성과를 중시하는 리스크 사회에서 니트족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라는 게 저자의 관점이다. 니트족 문제는 일본의 당면 문제이지만, 곧 우리나라의 문제가 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른다. 적어도 '교실붕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오가는 학교교육 현장만 본다면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거대한 성과주의 시스템의 식민지가 되어 있다. 성과주의 시스템은 능력이나 업적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수치화하여 평가할 수 있다면 나름대로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런 평가 체제가 있을 수 있을까.
아이 기르고 가르치는 일을 생각해 보자. 저자는 육아나 교육이 '제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라고 말한다. 공장에서 제품을 만드는 일은 매우 효율적이다. 기계 설비에 원료만 투입하면 짧은 시간 안에 어렵지 않게 '표준화'한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육아나 교육은 긴 시간이 걸린다. 10년이나 20년이 지나도 아이가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를 가늠하기도 결코 쉽지 않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아이들은 수시로 치르는 시험을 통해 그 자질과 능력을 '평가'받는다. 학교와 교사 또한,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냈는지를 기준으로 1년마다 '평가'의 대상이 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린다면, 부모들도 육아를 비즈니즈 관점에서 자기가 만들어낸 '제품'인 자식에게 어떤 부가가치를 덧붙였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생각한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성장을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하는 이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위에서 언급한 저자의 문제의식 속에 이미 그 해답이 담겨 있는지 모른다. 부모는 되도록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도록 한 채 느긋하게 기다려 준다. 어렸을 때부터 자잘한 심부름을 시키면서 노동주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끈다.
교사들은 아이들의 '스승'이 되도록 노력한다. 저자가 말하는 '스승의 조건'은 단순하다. '그 자신이 또 스승을 갖는 것'이다. 그럴 때 무한으로 이어지는 긴 연결고리 속의 자신을 발견하고 교직에 대한 강렬한 사명감을 가지게 된다. 슈퍼맨 교사는 죽을 때까지 슈퍼맨이기를 요구 받는다. 슈퍼맨 교사를 중시하는 체제는 냉혹하다. 백명의 학생을 잘 길러내도 한명이 실패하면 '형편없는 교사'라는 낙인이 찍힌다.
많은 부모가 아이들 앞에서 방향감을 잃은 채 헤매고 있다. 학교 교사들은 수시로 '성과, 실적'의 채근을 받으면서 바닥 모를 무력감에 빠져들고 있다. 그들 모두 이 세상이 문제임을 잘 알지만 스스로 먼저 나서서 바꿔보려는 몸짓을 쉽게 내보이지 못한다. 갈수록 스스로를 좀먹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죄수의 딜레마라고나 할까. 빛나는 통찰과 영감, 상식적이고 상투적인 생각들에 대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돋보이는 우치다 타츠루 선생의 <하류지향>을 통해 그 돌파구를 모색해보기를 권한다.
덧붙이는 글 | - <하류지향>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3. 7. 30 | 232쪽 | 1만 2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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