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 까다로운 사람이 맛없는 영국 음식은 어떻게 먹으려고?"런던에 간다고 했을 때 대다수 지인들이 보인 첫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음식 좋기로 소문난 전라도에서 태어났고, 특히 유별나게 요리를 잘하는 어머니 덕분에 어지간한 전라도 음식은 냄새조차 맡지 않는 까다로운 식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인들의 염려는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현실이 되었다. 런던에 와서 이런저런 음식을 먹는 동안 '차라리 내가 요리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었다. 영국인들이 맛있는 음식이라고 추천을 해봐야 기름에 튀긴 고기나 생선, 감자가 대부분. 그렇잖아도 튀김 요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나로선 그들의 추천이 야속할 뿐이었다.
원재료의 맛을 살렸다느니 제철 음식의 진수라느니 하는 표현은 상상할 필요조차 없었다. 한국슈퍼에서 산 달디 단 쌈장에 싱싱한 양상추를 찍어먹는 것이 미감(味感)에 모욕을 덜 주는 차선책이 되었다.
그래서 늘 궁금했다. 대체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말하듯 '피시 앱 칩스(fish&chips)'가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일까? 영국인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꼽으라면 우선 '도버 솔(dover sole)'을 꼽을 수 있겠다. 도버해협에서 잡히는 넙치를 살짝 구워 레몬즙을 뿌려 먹는 음식이다. 쇠고기를 구워먹는 '로스트 비프(roast beef)'도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라고 한다.
'음식'이라는 단어에는 식재료를 엄선하고, 식재료에 맞는 양념을 정하고, 조리하는 불의 세기, 심지어 조리 후 먹는 방식까지의 과정이 응축되어 있다. 그래서 한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을 이야기할 때는 고유한 식재료를 얻어내는 자연환경과 지역 특유의 조미방식 등 한 지역의 문화를 고도로 응축시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달군 불판에 구웠을 뿐인 쇠고기를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이야기하다니!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 피시앤칩스... 노동 착취 역사에서 탄생그나마 나름 시간을 들였을 '스모크 살몬(smoked salmon)'이 음식 구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불에 바로 구운 '직화 구이'가 아니라 연기로 구운 '훈제' 연어 요리니 말이다. 사람들이 흔히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이야기하는 피시앤칩스는 역사도 짧은 '패스트 푸드(fast food)'다.
영국에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세기.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더 많이 착취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더 많은 노동을 통해, 더 많은 생산품을 만들어내, 더 많은 이윤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자본가들에겐 노동자들이 점심 먹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점심을 더 빨리 먹여서 줄어든 시간만큼 일을 더 시켜야 했다. 복잡한 요리는 필요 없었다. 미리 튀긴 생선 한 마리와 미리 튀긴 감자. 피시앤칩스는 그렇게 잔혹한 노동 착취의 역사 속에서 탄생했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기 위해 탄생한 패스트 푸드, 피시앤칩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영국의 일반 시민들이 간편하게 먹는 점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피시앤칩스를 잘한다며 유명세를 타는 식당이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식 맛없는 영국'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은 변하지 않고 있다. 요즘 런던에서 유행하는 농담이 있다. 영국 음식 맛없다는 것은 다 옛말이란다. 영국 음식 맛이 하도 형편없어서 세계 각국의 요리 좀 한다는 이들이 런던에 '이 음식 좀 먹어봐' 하며 식당을 차려 먹을거리 천국이 됐다는 것이다.
런던 레이스터광장 지하철역 옆에 '가비네 식당(Gaby's Deli)'이 있다. 유대인인 가비(73 Gaby Elyahou) 할아버지가 나이 서른 살이던 1965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 가비 할아버지는 할머니로부터 요리를 배웠다고 한다. 중동식 케밥 등이 가비네 식당이 자랑하는 메뉴다. 먹을 것 형편없는 런던에서 보기 드물게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맛집'이다.
그렇다고 가비네 식당 음식 값이 비싼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싼 편이다. 이 식당의 단골은 주로 뮤지컬배우와 연극배우 등 가난한 예술가들. 허름한 주머니를 털어 밥을 먹으러 오는 예술가들에게 가비 할아버지는 중동식 케밥을 푸짐하게 만들어 주었다.
맛있는 음식과 친절한 요리사... 가비네 식당은 입소문이 나면서 런던의 명소가 되었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고, 세입자가 돈을 벌면 집주인이 생배가 아프긴 영국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건물 주인은 가비 할아버지에게 건물 리모델링을 핑계로 세를 엄청 높게 내든지 아니면 나가라고 했다. 가비 할아버지는 오른 집세를 낼 형편이 못됐다. 결국 가비네 식당은 거리로 쫓겨날 판이었다. 마치 서울 홍익대 앞 작은 식당이었던 '두리반'이 내쫓겨나듯….
소식을 전해들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내일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건물 주인에게 호소를 하고 여의치 않자 지방자치단체에 민원을 제기했다. 그리고 여러 신문에 건물주의 부당한 행태를 철회하라는 기고문을 보냈다.
영화 <피아노> 감독 마이크 리도 가비네 식당 살리기 앞장서2004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2012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영화 <피아노>의 감독 마이크 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가비네 식당을 파괴하려 한다면 그 책임을 깊이 져야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가비네 식당 살리기에 앞장섰다.
각계의 노력 끝에 가비네 식당은 2013년까지는 장사를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 완전한 해결은 아니지만 '유예의 시간'을 얻은 것이다. 홍대 두리반 식당이 531일이나 싸워서 그나마 작은 보상금을 받았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절반의 승리'라 말했다.
탐욕으로 뭉친 가진 자들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완전한 승리'를 얻어내기란 그렇게 힘든 일이다. 가진 자들은 계약서에 볼펜 글씨 하나 쓰면서 내가 피땀으로 모은 모든 것을 내놓으라 한다. 가난한 자들은 전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절반을 내준다.
'절반의 승리'는 그렇게 처절하고 잔인한 아픔이다. 그럼에도 기필코 '승리'라는 단어를 빼놓치 않고 쓴다. 그것은 차라리 기도다. '내가 이렇게 잔혹하게 당했으니 다른 사람은 나처럼 당하지 마라'고 피눈물로 쓴 육필 기도.
가비네 식당에게 주어진 유예의 시간이 두어 달 남짓 남았다. 식당은 여전히 단골 사람들로 붐비고, 가비 할아버지는 변함없이 주방에서 요리를 만든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더 살갑게 웃어주며 묻는다.
"어때, 음식 맛은 괜찮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