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는 경제 활성화에 진력해왔다. 그 결과, 실물경제가 모처럼 개선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직접 세일즈외교로 세계를 누비고 계시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아직도 대선과정에서 있었던 국정원 댓글과 NLL 의혹 등으로 혼란과 대립이 이어져 안타깝다. 정부는 국정원 댓글을 포함한 일련의 의혹에 대해 실체와 원인을 정확히 밝힐 것이다. 믿고 기다려 주시길 부탁드린다. 재판과 수사가 진행 중인 이 문제로 혼란이 계속된다면 결코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정홍원 국무총리가 28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골자는 앞서 언급한 내용 같습니다. 이날 아침 정 총리의 담화가 발표될 것이라는 소식이 긴급 타전되자 대통령은 뭘 하시고 왜 총리가 나서느냐 볼멘소리를 터뜨리는 트윗이 타임라인을 장식했습니다.
정 총리의 첫 번째 대국민 담화문을 두어 번 꼼꼼히 읽었습니다. 지금 이 국면에 박근혜 정부가 국민들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심정으로 찾고 또 찾아보았습니다.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대통령을 대신해 총리가 나섰으니, 적어도 지난 대선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과 관련해 정말 박 대통령 본인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그래도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비뚤어진 의식으로 잘못된 일을 벌였으니 그 자체로 박 대통령의 부덕의 소치라며 '내 탓이오'를 외치지 않을까 실낱같은 기대를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마치 고장난 레코드처럼 기존의 입장을 반복했습니다. 첫째, 국정원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았다. 둘째, 국정원 댓글 의혹 등의 사건에 대해 철저히 수사하겠다. 셋째, 그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믿고 기다려 달라.
믿어달라? 믿어? 누굴? 정 총리의 담화 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과정이 모두 마무리될 때까지 믿고 지켜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박근혜정부가 어떻게 해왔는데 뭘 어떻게 믿으라는 것일까요?
저는 정 총리의 담화를 들으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생각났습니다. "보통사람, 나 이 사람, 믿어주세요!" 그러나 그런 노태우 전 대통령을 믿었던 국민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요?
무엇보다 지난 임기 8개월간의 성과랍시고 국민경제를 볼모로 삼았습니다. 제가 꼬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총리의 담화가 마뜩찮았습니다. 마치 제 귀에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역대 정권 그 어떤 대통령보다 더 열심히 직접 세계를 누비며 세일즈외교를 하고 있는데, 그래서 국민경제 활성화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고 있는데, 너희는 대선 끝난지가 언젠데 아직도 지난 대선과정에서 벌어진 댓글의혹이나 제기하면서 대통령을 흔드는 것이냐,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준엄한 꾸짖음 같았습니다. 통치는 대통령의 몫이니 국민들은 이러쿵저러쿵 토 달지 말고 하라는 일이나 하면서 대통령의 뜻을 따르라는 명령으로 들렸습니다. 지금 경제가 얼마나 어려운데, 국민경제를 바로잡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데 자꾸 뒷다리를 잡고 늘어지느냐, 아주 못마땅한 비판으로도 들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 총리가 발표한 대국민 담화에 공감이 되십니까? 박근혜정부가 그토록 주장하는 '믿고 기다려 달라'는 당부가 올곧이 들리십니까.
국민경제로 바쁜데 토 달지 말라는 경고일까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원 댓글의혹사건 초반에 관련자들을 전부 수사하고 사법처리를 분명하게 했다면 어쩌면 박 대통령은 국민적 신뢰를 받았을 것입니다. 워낙 원칙과 신뢰를 강조해온 분이고, 그 뜻이 흐트러지는 걸 국민 앞에 별로 보여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정권을 거머쥔 뒤 박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이 어땠습니까. 국정원 댓글의혹 사건에 대해 안면몰수하고 모르쇠로 일관했고, 선거법 위반 혐의로 조사 중인 검찰 특별수사팀과 채동욱 검찰총장을 찍어냈습니다. 심지어 PK라인으로 사정기관을 라인업 하고 정치검찰로 바꿔버렸습니다.
국민들은 박근혜 정부가 국정원 댓글의혹사건에 대해 왜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바로 정권의 정당성 때문인 것이지요. 원세훈 전 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 대한 선거법 위반 재판도 전부 무죄가 선고될까 국민들은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판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유죄가 선고될 수 있을까요?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그렇게 사법적 결론을 낸들 우리 국민들이 정홍원 총리의 당부대로 믿어드릴 수 있을까요?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박근혜 대통령을 '벌거벗은 임금님'에 비유했습니다. 사기꾼의 꼬임에 빠진 어리석은 왕이 멋진 옷을 입었다고 착각하고 행차했지만, 어린 꼬마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얘기할 때까지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덴마크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가르침에 빗댄 것이지요.
민주당 "내각 총사퇴와 청와대 비서실 전면 개편 요구"민주당 초선 의원들은 정 총리의 첫 번째 담화가 발표되던 날 같은 시각 내각 총사퇴와 청와대 비서실 전면 개편을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국가기관의 헌법유린 사태 앞에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도 국정원에 도움 받은 것이 없다며 국민들의 진실규명 요구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박 대통령이 알았건 몰랐건 이미 사실로 확인된 총체적 관권부정선거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어 "정권 출범 이후 벌어진 수사축소·은폐시도와 외압에 대해 책임을 지라"며 "국가기관의 총체적 관권·부정선거에 대한 특검을 도입하고, 내각 총사퇴를 하라"고 주장했습니다.
민주당이 이렇게 주장해도 박근혜 대통령은 꿈쩍도 안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당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 어떤 정적에 대해서도 별로 겁먹지 않지만 국민들의 들불같은 저항에는 태도가 어떠실지 자못 궁금합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2008년 임기 초반 박근혜 대통령과 비슷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여중생들이 촛불을 들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를 외쳤을 때도 별스레 취급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광화문에 명박산성을 쌓고 스스로 국민과 단절한 뒤로는 엄청난 저항에 부딪쳤습니다.
그래도 박근혜 대통령은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이럴 수 있습니다. 김기춘 비서실장을 저희도 잘 압니다. 그분이 추구하는 정치의 방향이 무엇인지, 청와대 비서실에서 현정국을 어떻게 핸들링 할까 골몰하실 그분의 뜻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생각대로 기획대로 공작대로 움직이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물론 여전히 서강대 총장이었던 손병두 전 전경련 부회장처럼 "차라리 유신시대가 더 좋았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심학봉 새누리당 의원처럼 "아버지 대통령 각하"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겠지요. 앞으로 박근혜정부와 그 주변 인사들은 더 심각하게 유신찬양에 나서겠지요. '박비어천가'도 부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신격화, 우상화…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로잡는 유신미화작업에도 꽤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그런 정부의 노력에 대해 국민은 별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저 임기 내내 '벌거벗은 임금님' 취급을 받겠지요. 존경은커녕 무시와 멸시를 당하는 대통령. 사법정의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 관권부정선거를 무마한 뻔뻔한 대통령으로 남길 원하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박 대통령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전날 시구에서 박 대통령에게 쏴붙인 젊은이들의 '레이저광선'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