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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孝)는 백행지본((百行之本), 인간이 살아가면서 취할 수 있는 백가지 행실의 근본으로 유교의 중심 가치입니다.
효(孝)는 백행지본((百行之本), 인간이 살아가면서 취할 수 있는 백가지 행실의 근본으로 유교의 중심 가치입니다. ⓒ 임윤수

이 책을 부모님께 바칩니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지은이 마르티나 도이힐러, 옮긴이 이훈상)을 펼쳤을 때 첫 페이지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글입니다. 채 한 줄도 되지 않는 짧은 글이지만 어떤 효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생각하면 백행지본((百行之本), 인간이 살아가면서 취할 수 있는 백가지 행실의 근본으로 효(孝)를 강조하던 조선왕조의 시대적 상이 진하게 연상됩니다.

책을 다 읽고, 다시 첫 페이지를 펼쳐서 '이 책을 부모님께 바칩니다'라는 글을 또 한 번 읽고 나서야 500년 조선사에 드리웠던 시대적 가치이자 통치이념이었던 효를 공부한 서양인 노학자가, 조선의 후예인 독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마음을 짧게 간추리고 진하게 강조하고자 드러낸 말이 바로 이 글이 아닐까하는 짐작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한국학의 대가로 우뚝 선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

<한국의 유교화 과정>의 저자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교수는 1935년 스위스 취리히 태생으로 현재 런던대 명예교수이며, 한국학 대가로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서울대 규장각에서 유교를 연구하였으며, 1993년에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으로 위암 장지연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지은이 마르티나 도이힐러┃옮긴이 이훈상┃펴낸곳 너머북스┃2013.10.21┃2만 7000원
<한국의 유교화 과정>┃지은이 마르티나 도이힐러┃옮긴이 이훈상┃펴낸곳 너머북스┃2013.10.21┃2만 7000원 ⓒ 임윤수
이 책에서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조선 500년으로 상징되는 유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선에 도입되고, 어떻게 조선사회를 유교화 시켜 나갔는지를 가족과 제사문화, 그리고 그곳에 스며든 의례절차와 가치 등을 통해 살펴보고 설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추구하고 있는 시대적 가치는 '민주주의'입니다. 대한민국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땅에서 불쑥 솟아오른 개벽천지의 나라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1392~1910)이 있었고, 조선은 고려(918~1392)가 있은 후에야 있었습니다. 고려에서 조선, 조선에서 대한민국으로 이어지질 때마다 각각의 나라에서 추구하던 시대적 가치는 달랐습니다.

시대적 가치라는 말로 아우르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깃듯 요소들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해 단절되지 않습니다. 관성을 갖고 적응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다보면 화면이 겹쳐지며 서서히 다른 화면으로 대체되는 것처럼 역사에 포함되는 가치들 역시 서서히 등장하며 정착합니다. 또 퇴색될 때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게 아니라 페이딩(fading) 효과를 길게 넣은 영화장면처럼 관성을 나타내며 서서히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 유교의 뒤안길에서 한국 봤을 것

'유교'는 조선시대를 상징하지만, 1392년을 기점으로 하고 있는 조선의 역사처럼 어느 해를 기준으로 해 불현듯 등장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조선이 사라졌다고 해서 동시에 함께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문화는 100년쯤의 관성을 갖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가 서울대 성균관에서 유교를 연구할 때(1967~1969)는 유교의 관성이 아직은 진하게 남아있었던, 유교의 뒤안길 같은 시대라 생각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가정사에서 갈등을 유발시키는 대표적 사례로 자주 손꼽히는 일은 제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요즘, 제사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새기며 지내는 집안 또한 흔치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선조 때부터 지내던 것이니 지내야 한다거나, 남들도 다 지내니 우리도 지내야 한다는 관습 정도로 여기며 지내는 집도 없지 않을 겁니다.

제사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기 출계집단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사회적·의례적 기준을 규정하였다. 의례상 지위, 역학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상속권과 상복 의무다. 유교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정치적인 또는 공공의 영역은 가(家)가 직접 확장된 것으로 보았으므로 집안에서의 구속 시준은 공적 세계의 기회에도 적용되었다. 출계집단에서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인정받은 이들만이 정치 역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 사회 질서를 세우는데 제사를 중요시하게 되자 그 누구보다도 서자와 여성이 차별을 받았는데, 이들은 의례 체계에는 맞지 않았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 385쪽

시대적 가치가 달라지고 제사가 갖는 역학적 상관관계 또한 뒷받침 되지 않는 요즘에, 제사가 갖는 의미나 제도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할 가치일 수는 없을 겁니다. 의미도 모른 채 지내야 하는 제사는 며느리들에겐 부엌노동만을 강요당하는 고역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사가 갖는 의미와 제사에 포함된 상관관계를 충분히 알게 된다면 제사가 달리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 또한 관성에 따라 점차 해소 될 거라는 것을 알기에 마음의 여유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겁니다.

등산을 하다 산허리에 낀 멋진 운해를 본 사람들이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정작 운해가 낀 산허리 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 멋진 운해 속에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가 그랬을 겁니다. 유교적 가치가 산허리에 낀 운해처럼 아직은 관성으로나마 남아있는 시대를 살면서도 정작 유교가 뭔지를 제대로 고민해 보지도 않고 살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운해 속에서는 운해를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알갱이처럼 떠도는 수분을 통해 온 몸으로 느낄 수는 있을 겁니다. 운해 속에서 운해를 느끼려면 운해가 형성될 수 있는 물리적 조건 등을 알아야 압니다. 유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유교 속에서 유교를 제대로 알려면 유교가 포함하고 있는 시대적 가치와 도입 과정이나 배경 등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00댁'이 첩을 부르는 소리?

이 책을 읽는 내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과 '제 눈으로는 제 얼굴 보지 못한다'는 말이 갖는 의미를 여러 곳에서 새겼습니다. 고리타분한 요식 행위로만 생각하던 제사, 필요 없이 복잡하게만 생각되는 족보(친인척관계)에 담긴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요소들을 서양인 학자가 너무 쉽고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족보가 만들어 지는 과정: 의결-수단-교열-정서-편집-교정-인쇄-배포
(뿌리공원 효박물관)에서 촬영
족보가 만들어 지는 과정: 의결-수단-교열-정서-편집-교정-인쇄-배포 (뿌리공원 효박물관)에서 촬영 ⓒ 임윤수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 하나에도 새겨야 할 뜻과 알아야 할 의미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합니다. 장손이 우대받고, 문중 어른이 행세할 수 있었던 배경, 오복, 장례문화, 다처제 등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관습, 알 수 없었던 의례절차에 담긴 의미가 형체를 드러내는 실루엣처럼 점점 분명해집니다.  

'백호통'에서는 처첩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처와 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처는 '전부'를 의미한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하나이자 전부인 몸을 만든다. 천자로부터 일반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처가 갖는 의미는 모두 같다. 첩은 '사귐'을 의미한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 362쪽

집안에 첩이 있는지 없는지는 호적에 이름이 올라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들을 낳더라도 족보에 첩의 이름은 남지 않았다. 따라서 첩이 얼마나 일반적이었는지에 대한 통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첩은 자기 출신지 뒤에 '댁'이나 '집'으로 불렸다. 남편인 주인[君]과의 관계가 미약하더라도 타당한 이유 없이 혼인관계를 깰 수는 없었다. 여성에게는 이러한 혼인관계가 종종 생계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 364쪽

요즘도 시골엘 가면 어렵지 않게 할머니들이 다른 할머니를 부를 때 'OO댁'하고 부르는 걸 들을 수 있습니다. 할머니의 친정동네 이름에 '댁'자를 붙여서 이렇게 부르는 걸 택호(宅號)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택호가 본처가 첩을 부르는 호칭이었다고 하니 'OO댁'하고 부르는 택호는 참으로 조심스러운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이 할머니 저 할머니 할 것 없이 '
OO댁'으로 불리는 시골에서는 자칫 온 동네 할머니들을 깡그리 첩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실생활에 녹아있는 유교 본질, 좀 더 실감할 수 있어

대한민국 성인치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만큼 익숙하고 널리 알려진 말입니다. 하지만 '수신'에 다다르기 위한 전단계로 '격물·치지·성의·정심'이라는 4조목, 여덟 글자로 새겨야 할 4가지 덕목이 더 있습니다.

조선시대로부터 100년쯤의 시간이 지났으니 유교가 문화와 가치로 영향을 발휘하던 관성도 어느덧 끝났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사가 아직도 가정사에서 시대적 갈등요인으로 손꼽히고 있다는 것은 유교의 관성이 아직까지는 진행형이라는 반증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시대, 아직은 유교가 관성을 갖는 시대를 살면서도 정작 우리는 유교가 뭔지를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를 통해 한국은 어떻게 유교화 되었으며 우리 실상에 깃든 유교의 본질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적인 유교가 아니라 유교 형식(의례)에 깃듯 유교의 본질을 진득하게 더듬으며 새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이미 유교화 된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을 일독하는 시간은 유교에 깃든 가치를 국화 향처럼 피워 올릴 수 있는 유교향연의 시간이 되리라 봅니다.

덧붙이는 글 | <한국의 유교화 과정>┃지은이 마르티나 도이힐러┃옮긴이 이훈상┃펴낸곳 너머북스┃2013.10.21┃2만 7000원



한국의 유교화 과정 - 신유학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이훈상 옮김, 너머북스(2013)


#한국의 유교화 과정#마르티나 도이힐러#이훈상#너머북스#효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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