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정부가 판을 키워버렸다.
5일 오전 국무회의에서 사전예고도 없이 법무부 긴급 안건으로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건'을 의결함으로써, 소위 '이석기 RO(Revolutionary Organization·혁명조직) 사건'을 둘러싼 일련의 상황 전개는 단순히 통합진보당 차원을 넘어섰다. 이날 국무회의는 서유럽 순방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불참한 상태에서 열렸다.
'위헌정당 해산'과 관련한 헌법 문구는 명확하다. 헌법 제8조 4항은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핵심은 이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민주적 기본질서'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이번 청구는 그 '민주적 기본질서'의 폭을 대한민국 최고 헌법 해석 기관인 헌법재판소에게 제시해달라는 것이다. 헌정 사상 처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당 해산 심판 청구는 '또 하나의 사건'이다. 수원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진행 중인 내란음모 혐의 사건에서부터 촉발됐지만, 그보다 훨씬 차원이 크고 엄중한, '민주적 기본질서 해석 사건'이다.
급했던 법무부... 주장과 사실의 혼재이날 오전 10시경 브리핑에 나선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단호했다. 그는 "통합진보당은 강령 등 그 목적이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반하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이고, 통합진보당 핵심세력인 RO의 내란 음모 등 그 활동도 북한의 대남혁명 전략에 따른 것으로 분석됐다"면서 "신속히 정당 해산 심판을 청구하고, 이와 아울러 국회의원직 상실결정 청구 및 각종 정당활동 정지 가처분 신청 절차를 조속히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법무부가 배포한 보도자료는 33쪽에 달했다. 핵심 내용은 강령 등 진보당의 목적과 RO 사건 등 진보당의 활동이 모두 민주적 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특히 법무부는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창당 및 NL계열의 입당 과정, 강령 개정 및 3당 합당 등 과정에 북한 지령을 통해 북한과 연계되어 온 사실이 확인"됐고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과 달리 RO의 내란음모로 활동의 위헌성이 소명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법무부가 말하듯 창당과 입당, 강령과 합당 등 그야말로 당의 전 과정이 북한과 연계됐는지는 전혀 객관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다. 또 내란음모 혐의 사건은 위헌성이 소명되기는커녕 1심 공판이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이번 정당 해산 심판 청구를 급하게 서둘렀다는 흔적은 여기저기서 보인다. 최소한의 절차적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내란음모 혐의 사건에 법원 판단이 내려지기까지 심판 청구를 기다리는 게 맞다. 야당 등 반대 정파에서 '이것이야말로 국기문란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에도 정부는 여러 차례 "법원 판단을 기다리자"고 했다.
하지만 정부는 유독 이번 사건을 기다리지 않았다. 장주영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은 "내란음모 혐의 사실관계가 변호인과 검찰 사이에 굉장히 논란이 많은 가운데, 이것을 근거로 정당 해산을 청구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을 사전예고도 없이 대통령도 부재중인 아침 국무회의에서 기습적으로 작전하듯 처리해버렸다. 이날 오후 2시 서울고등검찰청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정점식 위헌정당·단체 관련 대책 태스크포스(TF) 팀장(서울고검 공판부장)은 검토 과정에서 "헌법 교수 다섯 분에게 의견을 구했다"고 말했다.
내란음모 사건과 정당해산 심판의 연관성
이번 진보당 해산심판 청구로 인해 수원지방법원 형사12부(부장판사 김정운)에서 열리는 내란음모 혐의 재판이 더욱 주목받게 됐다. 법리적으로 수원지법의 판결과 헌재의 심판이 연계되어 있지는 않다. 헌재도 이론심뿐 아니라 사실심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건이 별개라고 말하는 것은 소위 이석기 RO 사건이 터지지 않았어도 지금 이 시기에 정부가 진보당 해산심판 청구를 냈을 거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하다. 두 재판은 실질적으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형법상 내란음모 및 선동,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 혐의 등을 다투는 1심 재판에서 만약 일부 유죄가 나온다 하더라도 핵심인 내란음모 혐의가 무죄가 나온다면, 헌재가 진보당 해산 결정을 내릴 근거가 희박해진다. 반면 내란음모 혐의가 인정된다면 법무부의 주장은 더욱 힘을 받게 된다. 물론 이 경우에도 헌재의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내란음모 혐의 재판과 정당 해산심판 청구가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자동 연계는 아니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차원이 높다.
확실한 건 이것이다. 만약 내란음모 혐의가 무죄라면, 논리적으로 헌재가 해산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역풍이 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원지법은 30여 년 만에 열리는 내란음모 혐의 재판을 다음주부터 특별기일을 정해 집중심리할 예정이다. 12일(화) 첫 공판을 시작으로 매주 월·화·목·금요일 오후 특별기일을 열어 진행한다. 그만큼 1심 판결이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시험대에 오른 5기 헌재 이제 한국사회에서 용인되는 민주적 기본질서의 폭은 9명의 헌법재판관들 손에 달리게 됐다. 법률은 정당해산 결정을 탄핵 결정만큼 신중하게 처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반적인 판단과 달리 과반수가 아닌 9명 중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또 서면심리가 아닌 구두변론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번 해산이 결정되면 그 정당의 명칭은 다시 사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동일하거나 유사한 강령으로는 정당을 창당하지 못한다.
법조계에서는 헌재가 법원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것으로 보는 의견이 다수다. 180일 이내에 결정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이는 강제가 아닌 훈시 규정이다. 박주민 민변 사무차장은 "이번 건은 단순히 정당 하나 해산 문제를 넘어서서 헌법 해석에서 엄청난 의미가 있다"면서 "헌재는 나중에 어떤 평가를 받을까도 염두에 두고 신중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헌법학 교수는 "헌재가 사실관계 확인에 직접 나서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할지 좀 의문"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헌재는 5기로, 현 정부 출범 이후인 지난 3월말 구성이 완료됐다. 박한철 소장을 비롯한 3명을 박 대통령이 지명했고, 전체 9명 중 2명이 검찰 공안통 출신이다. 그 외에도 판검사 일색, 50~60대 남성 압도, 서울대 과점 등 출범 당시부터 다양성 부족과 보수화 우려가 제기된 상태다. 이들은 과연 보수파 정권이 정면으로 던지는 '민주적 기본질서가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에 뭐라고 답할 것인가.
이 근본적 질문에 답할 헌법재판관 9명은 박한철(소장), 이정미, 김이수, 이진성, 김창종, 안창호, 강일원, 조용호, 서기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