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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입니다. 11월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수도권입니다. [편집자말]
 1997년 달랑 가방 세 개만 둘러멘 채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1997년 달랑 가방 세 개만 둘러멘 채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 김대홍

학교 졸업 후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때는 1997년 8월. 곳곳에서 기업이 무너지고 나라가 부도난다는 이야기가 떠다니던 시기였다. 결국 그 해 12월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 요청을 했고, 나는 같은 달 일자리를 구하러 마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가진 돈은 단 30만원. 그 때부터 14년간 서울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많은 일자리를 겪게 될 지 그 때는 몰랐다.

1997년 그 해는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 인지도 순위 최상위권을 차지할 인물들이 세상을 떠났다. '흰 쥐든 검은 쥐든 잡기만 하면 장땡'이라던 덩샤오핑, 우아한 미모로 유명했던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 자비의 대명사 테레사 수녀, 컨트리 가수로 참 좋아했던 존 덴버가 그 해 부고란을 장식했던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 해 12월 새로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김대중이 뽑혔다.

반지하에서 옥탑방으로, 마지막엔 중간층으로

 서울에서 처음 살게 된 집은 동굴과 같은 집이었다. 대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상대방 얼굴이 보이지 않고 휴대폰도 터지지 않았다.
서울에서 처음 살게 된 집은 동굴과 같은 집이었다. 대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상대방 얼굴이 보이지 않고 휴대폰도 터지지 않았다. ⓒ 김대홍

월세방 한 칸 얻을 돈도 없이 서울로 올 수 있었던 건 친분이 있는 선배 덕분이었다. "일자리를 구하러 서울에 간다"는 연락을 받은 선배 C는 한마디 말로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그래, 심심하던 차에 잘됐네. 언제든지 와라. 네 집이다 생각하고 지내."

대학 시절부터 품이 넓고 사람 마다하지 않던 선배였다. 오죽하면 집에서 생활비를 받으면 후배들 밥 먹이고 술 사주느라 일주일 안에 탕진하고 나머지 기간 동안 허덕이며 지냈을까. 남 가려운 등 긁어주기를 좋아해서 사람들이 많이 따르지만, '허당' 기질도 제법 많던 선배였다. 유쾌한 기운이 넘쳐서 술이 거하게 취하면 아무한테나 '넙적' 인사를 해, 상대방을 깜짝 놀래키던 버릇도 있었다.

그런 선배를 믿고 옷 몇 개와 이불, 베개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고속버스를 탔다. 누가 보면 피난민 같았을 거다. 짐을 푼 곳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 지하방이었다. 한낮에도 상대방 얼굴이 보이지 않는 동굴 같은 곳이었다. 서울 도심인데도 휴대폰 안테나가 뜨지 않는 게 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당시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인들이 사는 형편은 대개 비슷했다. 30분 넘게 걸어 올라가야 하는 언덕 중턱에 사는가 하면, 두 명 정도 간신히 살 만한 방에 대여섯 명이 모여 살았다. 그에 비해 C선배네 집은 나름 괜찮은 편이었다. 그래도 동굴생활은 불편한 점이 많았다. 오래지 않아 반지하방으로 이사했다. 한낮에 거실과 큰방엔 햇빛이 들어왔다. 보증금 1500만원에 월세 10만 원짜리 방이었다.

비록 부족하지만 햇빛이 들어온다는 것에 환호했다. 선배가 서울에 올라왔다는 소문을 듣고 하나둘 사람이 모였다. 팔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자는 묘기를 보이던 노무사시험 준비생, 항상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으며 선배 C와 대립각을 세운 신참 영화스태프, 치명적인 수전증을 갖고 있었던 프로게이머 지망생이 식구였다. 식구는 많았지만 직장에 나가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며, 이따금 소풍도 다녔다. 선배는 '쓴소리' 영화스태프가 참여한 독립영화에 출연했고, 나는 '수전증' 프로게이머를 따라다니다 PC방 '죽돌이'가 될 뻔했다. 대구사투리가 강하던 노무사시험 준비생은 매번 독특한 이야깃거리를 싸들고 집에 들어왔다. 만족스런 생활이었지만 그 집의 약점은 한여름이었다.

장마철을 맞은 어느 날 회사일을 마치고 제법 늦은 시각 집에 돌아왔을 때 놀라운 풍경을 봤다. 거실불 전원을 눌렀는데 켜지지가 않았다. 어슴푸레한 상태로 뭔가가 움직이는 듯했다. 처음엔 도둑고양이인줄 알았다. 몇 분 뒤 어둠에 익숙해진 뒤에야 바가지며 세숫대야가 둥둥 떠다닌다는 걸 알았다. 촛불을 켜놓고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물을 퍼야 했다. 하필이면 처음 물난리가 난 그날 모든 식구들이 외박을 했다. 그런 난리는 장마철마다 반복됐다.

 우린 반지하방에 살면서 3년 동안 물난리를 겪었다. 방안에 가득한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기운에 지쳐 다음 방은 무조건 "물에서 먼 곳으로"를 외쳤다. 그렇게 옥탑방 생활이 시작됐다.
우린 반지하방에 살면서 3년 동안 물난리를 겪었다. 방안에 가득한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기운에 지쳐 다음 방은 무조건 "물에서 먼 곳으로"를 외쳤다. 그렇게 옥탑방 생활이 시작됐다. ⓒ 김대홍

3년 정도 그런 생활을 하자 모두가 지긋지긋해졌다. 물난리 없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이제 우리는 옥탑방을 찾기 시작했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옥탑방이 새로운 거처가 됐다. 여름엔 지나치게 더웠지만 더 이상 한여름 물을 퍼낼 필요가 없다는 것에 모두들 만족했다. 집 옥상에서 보는 야경은 환상적이었다. 겨울엔 옥상에서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쓴소리' 영화스태프는 어느덧 '투덜이' 영화스태프로 진화했고, 교사를 그만 두고 영화일에 뛰어든 '빡빡이' 후배가 새로 가담했다. '빡빡이' 후배는 이불과 쿠션, 베개더미에 기대어 거의 앉은 상태로 잠을 자는 기행을 보였다.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며 "내 친구 마이클"을 외치던 후배와 '투덜이' 영화스태프의 여자친구 등이 종종 놀러왔다.

선배집에 빌붙어 지내던 삶은 2004년 끝이 났다. 내 힘으로 반전세집을 구했기 때문이다. 보증금 2천만 원에 월세 10만 원짜리 반지하였다. 물난리 때문에 반지하에 대한 공포심이 있었지만, 그곳은 지형상 물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이젠 새로운 식구와 함께였다. 한 사람은 노무사 시험에 합격한 뒤 수련과정을 밟고 있었고, 또 한 명은 교사였다. 서울생활 1기 때 대부분이 무직자였던 것에 비하며 생활수준은 많이 높아진 편이었다. 서울생활을 시작하게 해준 선배 C는 수많은 시험을 모두 통과하지 못한 뒤 마침내 대학원에 간다며 낙향했다.

선배 C의 뒤를 이어 홍제동 시대를 연 우리는 점점 살기 좋은 곳으로 이동했다. 2년 전세기간을 채운 뒤엔 마침내 2층으로 올라갔다. 함께 살던 식구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30만원으로 시작한 서울생활은 대략 7년만에 70배 정도 경제력으로 불어났다. 2010년 서울을 떠날 때 가진 돈은 100배 넘게 불어 있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더 이상 물난리도, 뜨거운 뙤약볕 세례도 받지 않는 집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다.

대부분 근사한 옷 한 벌 사 입지 못하는 형편이었지만 주말마다 운동하러 다녔고, 연말이면 모여서 가장 큰 킹크랩을 삶아먹는 사치를 누렸다. 이 정도면 서울살이 성적표가 꽤 괜찮은 편 아닐까.

선배와 함께 겪은 '어리바리' 지하철여행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부딪힌 난관은 지하철타기였다. 사람은 많고 길은 복잡했다. 게다가 환승구간은 왜 그리 길고 꼬여 있는지.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부딪힌 난관은 지하철타기였다. 사람은 많고 길은 복잡했다. 게다가 환승구간은 왜 그리 길고 꼬여 있는지. ⓒ 김대홍

반 년 정도 서울에 먼저 올라온 선배 C는 서울가이드를 자처했다. 사회생활을 서울에서 처음 시작한 나에겐 반 년이라는 시간은 대단하게 느껴졌다. 서울은 여러모로 낯설었고, 무엇보다 지하철 타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웬 노선은 그리 많고, 환승은 그렇게 복잡한지 갈아타서 목적지를 찾아가는 건 서바이벌게임과 같았다.

그런 나에게 지하철 타는 요령을 가르쳐준 건 서울살이 반 년 경력에 빛나는 선배 C였다. 선배는 한 번 환승 뿐만 아니라 두 번 환승까지 부드럽게 해내는 내공을 보이며 나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선배의 지하철 타기 실력은 오래지 않아 약점을 보이기 시작했다.

2호선을 타고 서울대입구역에 가야 할 때였다. 선배는 종종 영어만 듣고 내릴 때가 있었는데, 'seoul' 'national' 어쩌고 하는 영어소리를 듣고 '후다닥' 내려버린 것. 그곳은 서울대입구가 아니라 교대역이었다. 우리는 잔뜩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교대역에서 힘겹게 다음 지하철을 타야 했다.

한 번은 비슷한 지명 때문에 약속이 어긋났다. 신천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 30분이 지나도록 오질 않는 거다. 선배 C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왜 이렇게 안오느냐"고 볼멘소리다. "그 건물이 안 보이느냐" "무슨 소리냐, 여기엔 그런 건물이 안보이는데" "몇 번 출구 앞에 어떤 가게가 있지 않느냐?" "몇 번 출구 앞엔 포장마차밖에 없다" 한동안 대화를 나눈 뒤에야 우리는 전혀 다른 장소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심히 조각 정보를 맞춰본 결과 선배가 있던 곳은 신촌역이었다. 공교롭게도 둘 다 2호선 구간이었고,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20구간 이상을 가야 할 정도로 정반대였다. 결국 우리는 1시간 이후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지하철 방향표시도 처음엔 암호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신호등처럼.
지하철 방향표시도 처음엔 암호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신호등처럼. ⓒ 김대홍
초창기 지하철을 타면서 가장 애를 먹은 것은 환승역에서 만나게 되는 역방향 표시였다. 타원형 모양 끝에 화살표가 달려 있었는데, 그 모양을 이렇게 해석했다.

'먼저 직진한 다음, 길게 반원을 그리면 환승하는 장소로 갈 수 있다.'

그게 아니었다. 바로 몸을 뒤로 돌려 반대로 가라는 표시였다. 정확한 뜻을 해독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때마다 심하게 복잡한 서울지하철을 탓하곤 했다.

세탁소 가격 표시도 그 땐 몰랐으니 지금 생각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어느 가게에 양복 5천원, 바지 3천원 적힌 걸 보고 서울은 옷가격이 참 싸다고 생각했다. 뒤늦게야 세탁 가격이란 걸 알았다. 지방에 있을 때 옷은 모두 집에서 빨았으니 세탁소를 갈 일이 없었다. 선배는 나한테 양복 2벌만 사 달라고 했는데, 만약 세탁소 문을 열고 "양복 두 벌 주세요" 했으면 주인이 얼마나 황당한 표정을 지었을까. 다행히 둘 다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5천원짜리 옷을 사는 데도 고심고심했으니, 그 덕분에 큰 망신은 당하지 않았다.

몇 십만이 사는 도시에 살다가 1000만이 사는 도시에 왔으니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다. 선배나 나나, 비슷한 처지에 올라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비슷한 곤란을 겪었고, 당시 술자리에선 그런 곤란을 안주 삼아 마셨다.

서울은 복잡하고 쉽지 않은 곳이었지만 마음에 드는 곳이 많았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다양한 중고물품과 미로 같은 골목이 많았다는 점이다. 주말이면 청계천에 나가 1만원에 10개씩 고를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사러 다녔다. 숨어 있는 명작이나 보고 싶었던 영화를 고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10만권 넘게 만화책을 쌓아놓은 책방에 가서 어린 시절 읽었던 만화책을 집어들고 쾌재를 부르기도 했다. 가전제품은 무조건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가져왔다. 5만원 미만으로 TV나 세탁기, 냉장고, 비디오재생기 등을 모두 살 수 있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가게나 주말에 열리는 중고옷가게 등을 찾아서 옷도 장만했다. 엄청 풍성한 중고물품 시장이 있었기에 서울생활하는 동안 새 제품을 살 필요가 없었다.

아르바이트 8개에 정규직장 7곳... 첫월급은 55만원

 서울에 있으면서 많이 벌고 시간은 자유로운 아르바이트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런 아르바이트는 없었다. 벌이는 적고, 자유시간은 없었다.
서울에 있으면서 많이 벌고 시간은 자유로운 아르바이트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런 아르바이트는 없었다. 벌이는 적고, 자유시간은 없었다. ⓒ 김대홍

1997년 서울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는 그렇게 많은 일자리를 갖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14년 동안 아르바이트만 8개, 정규직 직장만 7곳을 옮겨 다녔다.

첫 일자리는 피자 배달. 스포츠신문에 체인점 모집광고를 내던 사장은 중국 진출까지 생각할 정도로 꿈이 컸다. 피자집에선 피자를 배달하고 전단지를 붙였다. 덕분에 피자는 원없이 먹었다. 하루종일 피자를 배달하고 퇴근할 때면 사장이 "집에 갖고 가라"며 큰 피자박스를 내밀곤 했다.

그 뒤에도 출판교정, 호프집 서빙, 지하철택배, 아파트전기설비보조, 사무실청소, 땡처리 옷 배달과 같은 일을 했다. 2004년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이 도입되기 전 영화관에 가서 실제관객수와 보고관객수가 같은지 확인하는 일도 했다. 당시 영화관객확인아르바이트는 너무 쉬운 일이었기 때문에 어르신들이 서로 하겠다고 벼르던 일자리였다. "감히 우리 밥그릇에 손을 얹다니"라는 눈빛으로 나를 경계하던 어르신들 눈빛이 지금도 선하다.

첫 정규직장은 1998년 5월에 얻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통장에 찍힌 첫 월급 55만원. 크지 않은 돈이었지만 반 년 정도 모은 월급은 차압딱지가 붙은 우리 집 가구를 사는데 쓰였다. 한 해 전 IMF 시기 아버지 회사가 무너지면서 집과 가구가 모두 경매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신문사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기 때문인지 이후에도 같은 업종에서 줄곧 일했다. 역시 첫단추가 중요하다 했던가. 특이한 건 대부분 생긴 지 오래되지 않은 신생기업이었다는 점이다. 한 곳은 창업멤버였고, 다른 곳 또한 창업 5년 안팎이었다. 몸 담았던 회사 중엔 1년 만에 문을 닫은 곳도 있었는가 하면, 한 곳은 설립 3개월 만에 사라졌다. 예상과 달리 수익이 나지 않자 사장이 회사를 없애고 사라진 것.

그래도 몸 담았던 회사들 대부분은 어려운 초창기를 넘기고 나이를 잘 먹어가는 중이다. 몇 곳은 10년을 채웠고, 한 곳은 벌써 20년을 넘겼다. 그만큼 나도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겠지.

맨몸으로 서울로 올라온 친구나 선후배들 가운데 몇몇은 이젠 제법 자리를 잡았고, 몇몇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영화를 배우겠다고 온 후배는 이젠 영화계 중견스태프로 자리매김했고, 노무사 시험에 합격한 친구는 자격증을 던져버리고 노동운동계에서 활동 중이다. 임용고사 시험에 합격해 함께 동굴방 생활을 했던 선배는 몇 년 전 오랫동안 꿈꿔온 대안학교 교사로 취직했다. 프로게이머를 꿈꾸던 친구는 결국 '수전증'을 고치지 못하고 베트남으로 떠난 뒤 연락이 끊어졌다. 서울생활을 열어준 선배 C는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대안학교 교사가 됐다는데, 잘 논다고 해서 별명이 '노자'라나 뭐라나.

 서울살이하는 동안 국보1호 숭례문이 불에 타 사라졌다. 사진은 TV화면 캡처.
서울살이하는 동안 국보1호 숭례문이 불에 타 사라졌다. 사진은 TV화면 캡처. ⓒ 김대홍
사람만 변한 건 아니었다. 서울에서 사는 동안 청계고가도로가 해체됐고, 청계천을 오랫동안 덮고 있던 뚜껑이 열렸으며, 국보1호 숭례문이 불에 타 사라졌다. 버스전용차로가 생겨 버스 타는 게 많이 편해졌으며, 시외선 신촌역과 서울시청 뒤엔 큼직한 새 건물이 생겼다. 돌이켜보니 많은 것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가운데 그 시간들을 지나왔다.

2010년 겨울 서울을 떠나, 경남 낙동강가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을 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거의 안 벌고 거의 안 쓰는 삶이긴 하다. 매년 조금씩 부피를 줄이는 중이다. 서울에 살 때도 많이 쓰는 편이 아니었으니, 여기서 더 줄일 게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매년 쓰는 부피를 줄여나가고 있으니 불필요한 짐들이 많이 있었던 다는 걸 이제서야 깨닫게 된다.

서울에 있을 땐 가장 싸고 배를 불릴 수 있는 식당들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100원이라도 더 싼 집을 찾으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꼭 싼 집을 좋아해서라기보단 숨은그림찾기나 퍼즐맞추기와 같은 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삶의 부피를 줄이는 놀이를 하는 중이다. 조금씩 지출 크기를 줄여나가는 게 꽤 재미있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골목놀이나 다양한 삶의 공간들을 찾는 재미는 시골이 대도시를 따라갈 수 없다. 아마 여기서 어느 정도 비우고 나면 다시 게걸스럽게 채우기 위해 서울로 발길을 돌릴지 모르겠다. 어느 새 서울을 떠난 지 3년이 됐다.

아참, 서울을 떠난 건 보고 싶은 사람이 낙동강가에 살기 때문이다.


#서울살이#반지하방#옥탑방#지하철#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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