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인천 수도국(水道局) 달동네 박물관 자리엔 원래 여러 가구가 함께 살았던 동네가 있었다. 과거 새끼줄에 19공탄을 2개씩 끼우고 양손에 하나씩 든 뒤 골목길을 올라 단칸방과 쪽방에 연탄불을 피워야만 했던, 그런 집 말이다. 그때는 서로 남의 집을 오가며 밥을 같이 먹었다. 수제비를 끓이다 이웃이 오면 물을 더 부어 끓이고 수저 하나를 더 놓으면 됐던, 아련한 추억들이 묻어나는 곳이다.
난 1964년 이 달동네에 신혼방을 차렸는데, 새색시가 "이곳에선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해서
뒤돌아서서 주먹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기도 했다. 그만큼 나에겐 슬픔이 서린 곳이다.
일제강점기엔 인천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터에 수도국(水道局)이 있었다. 인천이 개항되고 일본인들이 중구 전동지역에 살게 되면서 그곳에 살던 조선인들이 이곳으로 쫓겨났다. 이후 이곳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6.25 때에는 고향을 잃은 피난민들이 1960~70년대에는 산업화를 맞아 일자리를 찾아 몰린 지방 사람들로 붐볐다.
수도국산 달동네는 수도국산 위에 있으면서도 수도시설이 없어, 주민들은 물지게를 지고 산 아래로 내려와 공동 수돗물을 파는 곳에 줄을 서 물을 받은 뒤 다시 산비탈을 올라가야 했다. 난 27살 때 이 달동네에 살았으니 1964년 이야기다.
달동네란, 산등성이나 산비탈 따위의 높은 곳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말한다. 달동네 입구에는 이발소, 구멍가게, 담배 가게, 공동수도, 연탄 집 같은 작은 가게가 다닥다닥 의좋게 붙어있고, 이들 가게를 지나서 달동네로 들어가는데, 이 길은 꾸불거리고 진흙길이여서 위로 갈수록 가파르고 좁아졌다.
수도나 변소를 집집마다 만들어 놓을 형편들이 못 되어, 공동변소에서 줄 선 사람들이 용변을 보는 사람더러 "빨리 나오라" 소리치는 풍경이 잦았다.
학생들은 연필을 아끼느라, 몽당연필에 침 발라가며 마분지로 된 갈색 공책에 글을 썼다. 침은 고무지우개 여서 공책에 침을 발라 문지르면 구멍이 뻥 뚫린다. 이 뚫어진 공책 구멍으로 세상을 내다보았던 추억이 있다.
아낙네들은 떡판과 팥죽항아리를 이고 부두 노동을 나가는 노동자를 따라가서 부두에서 팔기도 했다. 뒤돌아보면 힘들고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던 곳이지만 인천 발전의 심장이었다. 인천의 내일을 바라보던 눈들이 반짝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