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2004년 1학년을 마치고 군에 다녀온 뒤, 집안 사정으로 제때 복학하지 못했다. 학자금대출을 추가로 받을 여력도 안 됐고, 휴학을 연장하던 중에 결국 학교로부터 제적당하고 말았다.
청년 실업률이 전체 실업률의 2배가 되는 현실에서 고졸 신분으로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더욱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20대의 초반은 열정과 의지로 큰 문제없이 버텨낼 수 있었다. 군대를 막 다녀온 뒤 얻은 '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육체노동도 망설임 없이 해냈다.
문제는 20대 후반에 찾아왔다. 더 이상 내가 열정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체력이 금방 회복되는 스무 살로 평생을 지낼 수 없으니, 언제까지 육체노동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0대 초반에는 면접 때마다 젊어서 좋다며 반기던 인사담당자의 표정은 이력서 나이 란에 적힌 숫자가 늘어갈수록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변해갔다. "대학교는 왜 졸업하지 않았느냐"는 질문 하나는 늘 한결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덤덤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 딱 거기까지였다.
군대를 전역한 직후에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흔히 '막노동'이라 불리는 공사장 일도 했고, 하루 방문 고객이 1천 명 이상 되는 기차역의 푸드코트 주방에서 접시 닦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군대도 다녀왔는데 이 까짓 거" 하는 마음으로 하루에 수천 개의 접시를 닦았고, 여름철 땡볕 아래에서도 헬멧을 쓴 채로 공사 자재를 운반했다.
대학 복학에 실패한 이후 구미에 위치한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700도 이상 고온으로 가열된 알루미늄을 가공하여 휴대폰 케이스를 만드는 곳이었는데, 일이 워낙 위험하고 힘들어서 100여 명 남짓 되는 인원 중에서 20대는 나를 포함해서 2명뿐이었다. 밤낮없이 주야교대로 근무하면서 피로에 쓰러져 잠들곤 했다. 일하고 먹고 자는 것 외에는 나의 삶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6개월을 일하다가 오른손 손가락 2개가 으스러지는 사고를 겪고 끝내 공장을 떠나게 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내 손으로 직접 벌어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기분 좋은 일의 끝은 조금 허탈한 것이었다. 한 달 동안 치료를 받은 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로 떠났다.
돌아갈 학교도 없고, 갑작스럽게 일을 그만둔 스물넷의 젊은 나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아는 사람도 없는 땅에서 나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던 터라 정착 초반에는 여전히 막노동과 청소 일을 했다. 그러나 반년 뒤에는 어느 정도 영어 실력이 늘어서 카페에서도 일하고, 한국 제품 광고들을 주로 다루는 광고지 인쇄 업체에서도 근무했다.
고졸 구직자에게 '눈 낮추라'는 말뿐인 이 나라 호주 생활이 정말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나는 비자를 연장하여 2년간 지냈다. 최저임금이 한국의 4배 가까이 높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숙식은 물론 취미 생활을 즐길 여유까지 생기는 환경도 매우 좋았다. 여성의류업체 창고에서 그리스인 사장 밑에서 1년 가까이 일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평화롭고 일과 일상의 조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2010년에 귀국한 나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호주에서 다들 아이엘츠나 토익 등의 영어시험을 준비하며 스펙을 쌓을 때, 나는 벌어서 모은 돈을 모두 여행을 다니는 일에 썼고 영어공부는 독학으로 했기 때문이다. 세계 10대 자연경관 중에서 3곳이나 꼽힐 정도로 경치가 좋은 호주에서 더 많이 둘러보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돈을 모으고 토익 점수를 따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처음엔 군대를 다녀왔을 때와 같은 심정이었다. 호주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딴 세상에서 혼자의 힘으로 꿋꿋이 버텨낸 경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의지가 충전된 상태였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현실의 벽은 높았다. 호주에서 늘린 영어 실력은 어느 알바를 하든 외국인에게 간단한 안내가 가능한 회화 능력을 주었지만, 토익점수로는 800점으로 환산될 뿐이라 구직 활동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귀국 이후에는 주로 보안업체에서 일했다. 밤낮근무를 교대로 해야 하는 일은 변함이 없었고, 근무기강을 위해서 말할 때 '다나까'를 쓰는 분위기 때문에 마치 군대에 다시 온 기분이 들었다.
특정지역에서 고객들을 상대로 '통제'를 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온갖 항의를 듣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고함과 욕설을 듣고 뺨을 맞는 일도 있었다.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할 때엔 의식불명인 환자를 옮기느라 손이 피범벅이 된 경우도 있었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하루하루 전쟁과도 같은 업무환경에 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아르바이트도 경험이라고 생각한 나는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고 지원했고, 인쇄소와 서점·언론사 녹취록 알바·임상실험 피실험자 알바를 비롯해서 국내외에서 20가지 이상의 일을 해왔다. KTX 좌석에 꽂힌 잡지를 교체하는 알바를 할 때엔, 서울역에 잠시 정차한 열차에 수십 권의 잡지를 들고 올라타서 쏜살같이 뛰어다니며 '박지성 같은 체력'을 기르기도 했다.
그런데 고졸의 구직자에게 취업의 문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좁아지는, 흡사 바늘구멍과도 같은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력서를 넣고 지원한 횟수에 비해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올라오는 공고 자체가 대졸자를 원하는 곳이 많고, 고졸의 학력인 사람에게는 위험하고 힘든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런 직종의 급여마저도 한국에선 턱없이 낮은 최저임금과 맞물려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취업은 연애'라는데... 한국에선 '을의 연애'만 가능한가요스펙도 없고 대학 졸업장도 없는 고졸 구직자로서 한국에서 살아가기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눈을 낮추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취업에 성공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일의 노동강도와 근무조건, 급여의 액수는 '눈을 낮추는 정도'를 넘어서 '내 몸을 낮추어 바닥에 바짝 엎드리는 정도'에 가까워진다. 그것을 군말 없이 혼자서 감수해야만 하는 것을 과연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20대는 그런 상황 속에서 '울며 겨자 먹기'라는 말을 몸소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취업은 연애와 같다'고 말했다. 서로 상대방의 마음에 들어서 호감이 생겨야 연애하는 사이로 발전하듯, 구직자와 고용자도 각자 원하는 조건이 맞아야 서로에게 좋은 노사관계가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상황은 어떤가? 기업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직종에서도 높은 토익점수와 고(高)스펙의 학력을 요구하면서, 최저임금은 '더 이상 높일 필요가 없다'며 제자리걸음만 시키는 중이다.
그러면서 "청년구직자들이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는 발언도 끊임없이 한다. 이건 너무 일방적인 나머지 눈물겨운 짝사랑에 가깝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권력을 쥔 쪽이 상대방에게 무조건 요구하는 '갑질'이 바로 이런 것 아니었는가.
요즘 들어 호주에서 지낸 2년의 기억이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 더욱 잦다. 이력서에 사진을 붙이거나 신체사이즈 따위를 적어내지 않아도 되는 그곳에선, 비정규직으로 일하더라도 임금이 높아서 얼마든지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호주는 한국과 달리 인구가 적고 국가가 부유해서 가능한 것 아니냐고? 앞서 '연애'에 비유했듯이 이것은 '가능과 불가능'의 개념보다 '태도'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한국에서 고용자 측은 노동자에게 지금까지, 당연하다는 듯이 한쪽의 희생만을 요구하지 않았나.
광고문구에는 흔하게 '자랑스러운 회사'나 '세계적인 기업'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거나 눈높이를 낮추라는 촉구 역시 여전하다. 한쪽이 상대방의 입맛에 일방적으로 맞추어야 하고, 더 약한 쪽이 권리를 착취당하는 씁쓸한 '을의 연애'를 언제까지 지켜봐야만 할까.
한국이 '강한 자만 살아남는 동물의 왕국'이 아니라 '사람 사는 세상'이 되려면, 학력과 스펙의 차별이 줄어들고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2013년의 한국이 그런 사회로 변해갈 수 있다는 희망이 단지 헛된 꿈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