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통일이라는 것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주제가 아님이 분명해진 것 같다. 서로에게 총칼을 들이대고 전쟁을 치렀던 분단 1세대. 서로에 대한 증오도 극심했지만, 1세대만큼 조건 없는 통일에 가슴 설레하던 세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분단 1세대는 서서히 남과 북 양쪽에서 은퇴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잦은 기대와 실망, 희망과 좌절이 계속되는 동안 통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면서 삶에 지친 전후세대의 관심에서도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시대의 가치관도 변하고 있다. 산업화 시대, 민주화 시대를 거쳐왔던 세대들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개인 행복시대'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내가 속한 나라와 조직을 위해 기꺼이 나의 이익을 포기할 수 있었던 때와 달리, 이윤 추구와 경제적 이유를 배제하고 공동체를 위한 행동을 이끌어 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런 만큼 이해관계가 얽히는 집단간, 세대간의 이기주의는 정점을 향해 가는 느낌이다.
이러한 시점에 법륜스님은 통일이라는 우리 민족이 풀어야 할, 대담론을 들고 나왔다. 이미 식어 있는 이 주제를 스님은 어떻게 가슴 뛰는 통일이야기로 풀어 내겠다는 것인지, 개인 행복추구를 위한 복지가 주요 관심사인 주류 국민들에게 도대체 무슨 반대급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인지, 마침내는 이 행진에 동참시키겠다는 것인지. 책의 첫 장을 넘기면서도 기대와 의구심이 교차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는 성장과 분배, 경제민주화라는 풀리지 않는 경제 문제로 퇴로 없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수준을 벗어나 더 큰 복지를 열망하는 국민들은 점차 국가의 역할에 대해 실망하고 있다. 지속적 성장을 응원하기에는 돌아오는 과실이 크지 않으며, 고용 없는 성장으로 그 과실은 승자가 독식한다. 분배 또한 평등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대기업을 배경으로 둔 거대 자본은 소상공인이 자생하던 시장에 진입하여 조건 없이 평등하게 경쟁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중소기업, 소상공인의 사업 영역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경제민주화의 취지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공허해 보인다. 자본주의의 속성은 부족한 하나가 완전히 도태되어 사라질 때까지 집요한 공격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내부에서 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인가. 수많은 선거가 치러질 것이고, 수많은 후보가 이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겠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는 문제일 것임에는 분명하다. 법륜스님은 통일 이후의 한반도를 이 문제의 해답으로 제시한다. 저 광활한 미개척지로 남아 있는 북쪽 땅을 바라보라 주장한다. 남북한 인구가 합해지면 7천만을 넘어서게 되고, 이는 영국이나 터키, 독일과 어깨를 견줄만한 단일 경제권이 가능해진다. 개발이 전무한 북한 땅은, 세계적으로 상당한 수준으로 평가받는 남한의 건설회사에게는 무한정의 사업무대가 될 것이다. 남한에서 쓰여지지 않는 중고자재나 잉여물품은 북한에서 재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일정 기간 적절한 통제하에 이뤄지겠지만, 북한의 노동력 또한 남한에서는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경제 단일권 내의 수요가 자립경제가 가능할 정도의 수준으로 넓어진다. 이럼에도, 통일이 과연 정치적이고 민족의 감성적인 문제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인가. 통일은 어쩌면 정치적 문제에 앞서, 개인의 복지를 열망하는 변화된 남한세대에게 경제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보다 더 쓰임을 받을지도 모른다.
먼저, 남한 내에서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이 이루어졌다면 다음은 남북한이 어떻게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것인가의 방법론이 필요하다. 극명하게 갈라져 대결해 왔던 근대사로는 당장에 상대를 포용할 만한 요소가 부족하다. 그러나 고대사로는 가능하다. 더 넓은 만주벌판을 호령했던 기상 넘치던 고구려의 역사와 발해의 역사, 더 거슬러 올라가 단군 고조선의 역사에 이르게 되면, 현재의 남북관계는 장구한 한반도 역사의 작은 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과북이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를 가진 하나의 민족임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으며, 통일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남북관계 이전에도 한반도에는 여러 차례의 분단이 있어왔다. 그때마다 통일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통일이 주는 시너지 효과를 온전히 민족적 역량으로 승화시키려면 무엇보다도 그 모든 과정이 평화로워야 한다. 신라의 가야병합은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김유신은 가야사람으로 신라의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가야가 아닌 신라장군 김유신으로 기억된다. 인적 물적 손실 없는 병합이 신라의 국력신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세계 열강들의 세력 판도의 한 가운데에 위치에 있는 남북한의 녹록지 않은 현실을 감안해 볼 때, 통일에 앞서 평화로운 통일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평화로운 병합은 현재의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남한의 국립묘지를 인정하듯이 북한의 열사릉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신라의 김유신과 백제의 계백은 당대에는 철천지 원수였겠지만, 우리민족 역사에는 다같이 훌륭한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대의 지도체제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야 만이 통합을 위한 초석을 놓을 수 있다. 북한의 지도부의 불안을 불식시킬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하고, 남한의 보수론자에게 돌아갈 열매도 제시되어야 한다. 또한 북한 주민들이 남한과의 연대를 가장 필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되어야 한다. 기초 생활에 필요한 물자가 받는 사람이 치욕스럽지 않게 부끄럽지 않도록 배려되면서 지속적으로 지원되어야 한다. 남한의 경제적 발전상이 북한 주민에게는 커다란 동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련 붕괴로 인한 냉전시대의 종식으로 시작된,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가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급성장으로 정치, 경제의 중심 무대가 양강 체제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일방적 강국이 없는 현시점을, 법륜스님은 남북당국이 통일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시기라고 말한다. 자주적인 세력 형성이 불가한 중소국으로서 강국에 대한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만큼 창의적인 외교력이 필요하고, 미국이나 중국이 국제정세상의 세력판도를 위해 한반도에 그들의 이해관계를 뻗치기 직전인, 지금의 느슨한 상태가 우리민족에게는 몇 번 찾아오지 않을 통일의 좋은 기회가 된다. 법륜스님의 마음이 조급해지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분단국가로서 엄청난 손실을 감수하면서 살아오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기업들은 분단으로 인한 엄청난 디스카운트를 감수하고 있다. 남북한이 지출하고 있는 천문학적인 국방예산은 응당 쓰여야 할 남한의 복지예산의 발목을 붙잡고 있으며, 북한주민에게는 식량부족을 포함한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단지 실현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통일이라는 문제를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 것일까. 왜 하필 분단된 조국에 태어나 남이 하지 않는 고생과 걱정과 불안을 느끼며 살아야 하느냐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인가. 아무런 걱정이 없는 나라가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도 없지만, 이런 난관이나 과제가 없다 한들 과연 우리가 행복할 것인가.
법륜스님의 세상을 관통하는 새로운 100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역동적인 조국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하는 통일이라는 숙제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