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화) 오후 7시 전북 군산시 영화동 평생학습관 3층 강당에서 열린 '群山學'(군산학: 군산을 제대로 이해하기) 제3기 아홉 번째 강좌에서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위경혜 교수는 '군산의 극장문화'란 주제로 강의했다.
조선철도국 자료 <호남선>에 의하면 군산에 처음 선보인 극장은 명치좌와 군산좌로 이들 극장은 1906년~1914년 사이에 개관하였다. 그중 명치좌는 일제가 격자형으로 조성한 도심지 명치통(중앙로 1가)에 있었다는 것만 확인될 뿐 정확한 위치와 개관일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죽성동 구 서해방송국 뒤에 있었던 군산좌가 군산지역 극장의 효시로 전해진다.
1914년을 전후해서 군산은 항구도시로의 기반 시설을 갖추게 된다. 내항에 쌀 수탈을 위한 부잔교(뜬다리) 3기가 설치되고 각국 거류지 제도와 거류민단 제도가 철폐된다. 지방행정제도 개편으로 군산부에서 옥구군이 신설된다. 도내 최초로 도심지에 수돗물이 공급되고, 우편국, 병원, 은행, 경찰서, 언론사, 학교 등이 들어선다. 1913년 당시 군산 인구는 한국인 4418명, 일본인 4742명으로 일본인이 324명 더 많았다.
조선인의 열악한 경제와 군산좌
개항(1899) 이래 군산의 조선인 숫자는 지속해서 늘어나 1920년대 후반에는 일본인의 두 배에 달하게 된다. 하지만 조선인 남성은 일본인 사업체나 부두 노동자로 생계를 꾸렸으며 여성은 일본인 가정 식모나 정미소 선미공, 유흥업 등에 종사하였다. 따라서 조선인의 경제활동은 무척 미미했으며 가계 사정도 좋지 않았다.
위 교수는 "군산은 물자 수탈을 위해 일본인이 계획한 도시였기에 조선인이 사업가로 성장하거나 경제활동의 주축이 되기에는 여건이 너무나도 취약했다"며 "극장을 보유하거나 운영하는 일 또한 조선인의 몫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조선인은 극장을 이용(관람)하는 것조차도 경제 여건이 따라주지 않을 정도로 궁핍했다는 것이다.
"1928년 군산좌에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상영한 영화 입장료가 무척 저렴하게 책정된 것에서도 어려운 조선인 경제가 감지됩니다. 경성의 흥행사 임수호가 군산좌에서 상영한 활동사진 입장료가 일반인은 40전, 조선일보 구독자는 할인 혜택으로 20전을 받습니다. 이는 당시 전북 평균 입장료(대인 55전, 소인 30전)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조선인 관객의 경제적 빈곤을 반증하는 그래프이기도 하죠." 위 교수는 "기독교계열 학교가 주최하는 소년소녀 음악 가극대회가 같은 해 희소관에서 열렸는데, 이때 입장료가 특별권 1원, 보통권 50전, 학생권 30전으로 전문성이 결여된 가극 입장료가 군산좌 영화보다 높게 책정됐다"며 "이는 군산좌 건물이 노쇠하고 위생 상태를 지적받은 낮은 등급에도 연유하겠지만, 군산좌를 드나든 관객의 경제가 얼마나 열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한편 군산은 경술국치(1910) 이전에 도시체계를 갖추지만, 1923년에 생활하수 처리 공사가 착수될 정도로 위생문제는 늦게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특히 군산극장은 조선인 빈민층 거주지와 색주가를 배후로 두고 있어 불결한 장소로 바라보는 시선이 지속됐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선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확대됐고, 2002년 1월 '개복동 윤락가 화재 참사' 이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조선인 전시동원 선전과 문화운동 장소로 사용됐던 희소관
1920년대 초 군산 개복동에 개관한 희소관(喜笑舘)은 1927년 현재 경영주가 일본인 가와카미(河上)이고, 개관 이래 일본인이 소유한 군산좌 역시 1926년 당시 소유주는 일본인 도전(島田)씨였다. 1932년 군산극장(군산좌)이 일본인 본위에서 조선상설관(朝鮮常設館)으로 전환했을 때도 극장 주인은 일본인 송미인평(松尾仁平)이었다.
특히 희소관은 전북 최초의 영화 전문상영관으로 일본인을 주요 고객으로 삼아 영업을 하였다. 위 교수는 "1925년 7월 희소관에서 발생한 상해(傷害) 사건 가해자가 일본인 해설자(변사)이고, 피해자는 조선인 악사(樂士) '조남월'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으며, 그렇다고 희소관이 절대적으로 일본인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희소관은 일본어가 필요 없는 공연도 무대에 올라 조선인 입장도 가능했습니다. 1928년 기독교계열 학교 영신학원과 구암유치원이 주최하는 '음악 가극대회'가 희소관에서 열렸습니다. 영신학원은 1920년대 지역사회 운동을 이끌던 야학이었고, 구암유치원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세운 조선인 아동 교육기관으로 수입이 아닌 기금 마련이 목적이었는데요. 이 행사는 '민족'이 아닌 '교회공동체' 호명에 의해 열리게 됐습니다. 조선인을 대상으로 희소관에서 열린 행사는 입장객이 무척 제한적이었습니다. 서구 문화에 익숙한 식자층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었죠. 주요 사례로 군산연예회 현상 전국 규모 '신구독창대회'와 군산부인교육회 주최 성악가 차재일의 독창회를 들 수 있습니다. 차재일 독창회는 이보다 2년 앞서 경성에서 열렸던 것으로, 희소관은 개화의 중심지 경성의 행사를 지역에서 재연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전파했던 것입니다."위 교수는 "1920년대 드물게나마 희소관에서 열린 조선인 대상 행사는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1930년대 중반 한 차례 등장한다"며 "1936년 조선, 동아, 매일 등 4개 언론사가 테너 김훈의 독창회를 개최하면서 만주와 중국까지 순회공연을 계획 중이라고 선전하는데, 이는 대동아 공영을 조장한 일제의 문화정치 일환으로 전시동원 체제에 조선인 동원을 위한 선전 문구였다"고 덧붙였다.
군산좌의 태동과 관람 문화의 변화
위 교수는 "초창기 군산좌가 있던 강호정(죽성동)은 일본인 거류지 끝자락인 죽성리(竹城里)로, 일본 거류민단 주요 사업의 하나였던 유곽(遊廓)을 조성할 때 후보지로 거론됐던 지역이다"며 "군산좌는 군산은 물론 전북 최초의 옥내 공연장으로 1920년대 개복동에 개관한 희소관(喜笑館)과 함께 군산 지역 극장을 대표했다"고 말했다.
군산좌는 2층 건물로 개관 초기 일본 전통극 가부키(歌舞) 중심으로 공연하였고, 변사가 진행하는 신파극(활동사진)과 연극(국극, 창극)도 상영하는 다기능 공연장이었다. 당시 군산좌는 관객이 표를 사서 입장하면 신발을 보관함에 맡기고 번호표를 받았다. 실내는 좌석이 없는 널찍한 다다미방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방바닥에 앉아 공연을 관람했다.
겨울에는 자부동(방석)을 빌려 무릎을 덮었으며, 차와 모찌(찹쌀떡) 등을 파는 여종업원이 있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등받이가 있는 기다란 나무 의자가 놓였다가, 철재로 만든 개인 좌석이 등장하였고, 차와 찹쌀떡 대신 껌, 땅콩, 캐러멜, 오징어, 음료수를 팔았다. 그러나 방석은 스팀 시설을 갖춘 제일극장이 개관하는 1963년 이전까지 극장에서 요금을 받고 대여해주었다.
군산좌는 1925년 화재로 문을 닫고 1926년 2월 개복동에 건평 240평 규모의 건물(군산극장)을 신축한다. 당시 군산극장은 연극·영화를 동시에 공연할 수 있는 다기능 공연장으로 원형 무대를 갖추었고, 공연할 때는 사람이 들어가 무대를 돌렸다. 정전(停電)에 대비하여 발전기를 보유하고 있던 군산극장은 1996년 우일시네마로 바뀌었다가 2007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군산극장과의 거리가 불과 100여 미터 거리(개복동)에 있었던 희소관 역시 2층 건물로 초기에는 오후 1시와 오후 8시 하루 2회 상영하였다. 영화 전문 상영관이었기에 학생 단체관람이 많았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여러 차례 극장주가 바뀌고 명칭도 남도극장, 국도극장 등으로 바꿔가며 운영되다가 군산극장과 비슷한 시기에 문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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