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가지 않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최고 정점을 찍었던 2009년의 대학 진학률은 80퍼센트에 육박했다. 올해는 그 비율이 71.3퍼센트로까지 떨어졌다(교육과학기술부·한국교육개발원, '2012년 교육 기본 통계'). 3년 만에 10퍼센트가 넘는 감소세를 보인 것이다. 고3 학생 10명 중 3명 정도는 대학이 아니라 사회에서 본격적인 성년기를 맞이한다.
대한민국은 이른바 '학벌·학력 공화국'이다. 학벌·학력이 취업이나 인생의 향방을 크게 좌우하는 사회다. 그런데도 최근 상당수의 학생들은 대학을 '필수'가 아니라 '옵션'으로 여긴다. 지배적인 흐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분위기가 심상찮다. 스스로 대학 포기 선언을 부르짖으며 교문을 뛰쳐나오는 학생들도 있다.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무엇보다 비싼 등록금과 생활비 등 경제적 비용 부담을 가장 큰 배경 요인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대학교육연구소의 '1990년 이후 등록금 인상률 현황' 분석 자료에 따르면, 사립대 등록금은 1990년에 비해 4.9배, 국립대는 4.1배 상승했다. 24년간 사립대 등록금은 연평균 7%, 국립대는 5.85%씩 오른 셈이다. 사립대 인상률은 물가상승률(연평균 4.13%)보다 1.7배나 높은 수준이다.
그런데 이렇게 해마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등록금 수준에 걸맞게 대학교육의 수준도 올랐을까. 학생들은 교수들로부터 열정적인 강의를 듣고, 세상을 넓고 깊게 보는 안목을 기르고 있을까. 이 질문을 이 책의 저자들에게 던진다면 단호히 '아니오'라고 답할 것이다.
'미국 명문대는 등록금을 어떻게 탕진하는가'라는 부제가 붙은 <비싼 대학>은 허울뿐인 미국 대학교육에 대한 통렬한 비판서다. 각각 정치학과 명예교수(퀸스대학)와 기자(뉴욕 타임스)인 저자들은 미국의 대학교육이 본연의 목적을 상실했다고 전제한다. 이를 통해 저자들은 대학 캠퍼스가 직업훈련장으로 변질돼버린 과정, 그리고 교수와 행정직원, 그리고 총장들이 대학이라는 거대한 배움터를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어떻게 유용하고 있는지를 고발한다.
"교수님들은 우리를 위해 여기에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저자들이 보여주는 미국 대학교육의 현실을 살펴보자. 미국 상위권 대학의 학부 졸업장을 따려면 총 25만 달러(환율을 1달러당 1000원으로 계산하면 2억5000만 원) 이상의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학비와 기숙사 비용만을 합쳐 1년 단위로 계산하면 5만400달러 정도다.
공립이나 사립이나 실질 화폐가치로 따지면 30년 전에 비해 등록금이 2배 올랐다. 이 정도면 24년 만에 4배 이상 뛰어오른 우리나라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그런데도 저자들은 이 정도의 등록금 인상은 어떤 기준으로 보든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 상황이라고 말해야 하나.
2배든 4배든 등록금이 인상되면 거기에 발맞춰 교육수준이 올라가고 교육 양이 늘어나는 게 순리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자신들이 치른 비용만큼 만족감을 얻는다면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저자들이 보기에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많은 교수가 해묵은 강의 노트를 사용한다. 컴컴한 강의실에서 파워포인트만으로 일방적인 강의를 하는 교수들도 부지기수다. 강의 내용은 전공 학문의 종합적인 이해와 무관하게 자신의 경력 관리 측면에서 잘게 나눠진 세부 주제에 맞춰질 때가 많다.
무한 경쟁에 내던져진 대학들은 교수들에게 실적 쌓기용 논문 쓰기를 강요한다. 교수들도 논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커리어 관리를 하게 되니 대학 당국의 요구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다. 저자는 이런 분위기를 '논문 발표 바이러스'에 비유한다. 덕분에 학생들은 비싼 등록금을 지불하면서도 교수를 자주 만나거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지적 자극을 받거나 인문적 교양을 쌓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교수님들은 우리를 위해 여기에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하버드대학교의 3학년 학생 한 명이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가 하버드대학교에 온 이유는 우리가 받는 교육 때문이 아니라 이 학교의 학위가 우리에게 주는 명성 때문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오리건주립대학교에 다니는 네이선 십먼의 경험담은 더 적나라하다. "여기에는 선생님이 없어요." 그가 말했다. "교수님들은 강의 첫날에 이렇게 말하더군요. '나는 연구를 위해 이 학교에 있는 겁니다. 강의는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은 한 학기를 재미있게 보내지는 못할 겁니다.'" (102쪽, '가르치지 않는 대학'에서)저자들이 보기에 대학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연구하시오! 쓰시오! 발표하시오!'가 그것. 결코 '학교'의 본질인 '교육'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들이 보기에 학문을 가장해 진행되고 있는 연구 대부분은 지성의 확장에 기여하지도 못한다. 한마디로 자신들만을 위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
12개 '특급대학'의 가치를 제대로 따져보라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대학 교육은 누가 담당하나. 저자들은 미국 대학이 서로 다른 지위를 가진 약 90만 명의 '정규직 교수'로 구성된 일종의 '카스트 제도'에 묶여 있다고 말한다. 이들 중 32만 명의 정교수와 부교수, 그 바로 아래의 17만 명 정도 되는 조교수 등은 종신직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연구든 교육이든 특별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학생 교육의 상당 부분은 나머지 41만여 명이 속해 있는 비정규 교원(전임강사, 초빙강사, 시간제강사, 조교 등)의 몫이다. 교육부가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첫 해인 1975년에 계약직 교원은 전체의 43퍼센트였지만 지금은 70퍼센트에 이른다. 그만큼 미국 대학교육에서 비정규 교원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규직 교원과 비정규직 교원 간의 격차는 어느 정도일까. 가령 미국 명문대 중의 하나인 퀸스대학의 정교수는 강의 하나당 1만7000달러를 받는다. 하지만 같은 학교의 시간제 강사가 받는 돈은 4600달러에 불과하다. 4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 저자들은 이를 '기형적인 대학 시스템의 한 예'로 규정하면서 "대학은 같은 자격을 갖춘 사람이 바로 옆에서 비슷한 일을 하면서 보수 면에서는 가장 큰 차이가 나는 직장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미국의 경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인 수치나 학교 이름 등에만 유의하면서 읽어가면 그대로 우리나라 대학교육에 대한 책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 정도로 두 나라의 대학교육 실태가 흡사해 모든 내용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간다.
학자금 대출로 인해 졸업 후 첫 사회생활을 빚으로 시작해야 하는 고비용 학비 구조의 폐해, 직업훈련소처럼 운영되는 허울뿐인 대학교육, 아무런 명분도 없는 종신교수제, 쓸모없는 연구를 양산하고 불필요한 비용을 유발하는 유급 안식년 제도 등은 그대로 우리나라 대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12개 '특급대학'의 가치를 제대로 따져보라는 저자들의 제안에도 특별히 관심이 간다. 12개 특급 대학은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 12개교를 말한다. 저자들은 이들 대학의 지위가 과대평가되었으며, 여러 가지 면에서 실질적인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저자들은 12개 특급대학 졸업생 모두가 인생이나 직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추적 조사를 통해 실증하고 있기도 하다.
자신이 앞장서서 대학의 존재 이유를 허무는 대학들대한민국 제19대 국회 국회의원의 출신 대학 분포를 보면, 서울대가 78명으로 압도적인 1위다. 2위, 3위는 26명의 고려대, 24명의 연세대 등이다. 그런데 이들이 과연 출중한 정치 감각이나 능력이 있어서 국회의원에 그렇게 많이 당선된 것일까.
나는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겠다. 명문대학 중심의 학벌주의가 유난히 강한 대한민국 풍토 때문이다. 저자들을 따라 좀 더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서울대를 포함한 대한민국 특급대학의 위상이 심하게 부풀려졌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의 능력을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 보는 사람들의 과분한 대접 덕분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저자가 전해주는 미국 대학교육의 비양심적인 모습은 그들이 '최후의 심판'을 자초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대출을 받아 어렵사리 마련한 학자금을 지불한 대가로 학생들은 저임금을 받는 시간제 강사나 조교가 가르치는 대형강의실에서 4년을 보낸다. 대신 학생들이 낸 대부분의 돈은 교수의 종신제와 안식년제, 교수들의 특혜 유지와 연구소, 의과대학, 운동부, 시설 확충, 홍보, 행정 등 학부생 교육과는 무관한 분야에 쓰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는 먼 나라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한국 대학이 사회와 기업에 종속된 지는 오래다. 대기업과 결탁한 대학 당국은 캠퍼스 안에 대기업 이름이 달린 거대 건물을 올리고, 대기업 소유의 점포를 들이는 등 대학을 난잡한 시장판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아니, 이미 대학은 기업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대학 존립의 최대이자 유일무이한 이유가 마치 '취업'이라도 되는 양 취업률이나 취업 관련 프로그램 등을 학교 홍보지의 맨 앞자리에 내세운다. 교육당국은 손 한 번 안 대고 스스로 취업에 목을 매는 대학들을 구조조정의 벼랑 앞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그들 자신이 앞장서서 대학의 존재 이유를 허무는 길을 따른 결과 스스로 존립의 위기에 내몰린 것이다. '최후 심판의 날'에 그들이 내지르는 단말마가 과연 무엇이 될지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 <비싼 대학> (앤드류 해커 클로디아 드라이퍼스 지음, 김은하 박수련 옮김 | 지식의날개 | 2013. 11. 5 | 337쪽 | 1만7천 원)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