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조합원 최종범씨의 사망 이후 노동강도가 극에 달한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이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기존 노동연구에서 주로 다루었던 임금, 복지, 노동시간 등의 전통적 문제에 더해, 감정노동, 자기결정권, 인권침해 등 추가적인 문제들이 부각되고 있다.
비정규직, 일용직 등 사회적으로 소위 '밑바닥 노동'을 담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증가는 여러 측면의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 기존에는 주로 빈곤, 복지수혜계층, 임금불평등 확대 등 사회적 문제, 소비여력 저하로 인한 내수부족, 가계부채 증가 등 경제적 문제 등이 주로 지적되어 왔지만 이제는 시민의식, 정치참여 등 민주주의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다.
최근 사회학에서 주목받고 있는 이론 중 하나인 SES(social economic status) 모델은 정치참여의 인과관계를 설명해 온 중요한 이론적 모델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고소득층, 직업위계가 강한 직종, 고학력 등의 계층은 정치에 참여할 시간, 돈, 참여 기술이 풍족하며 관련 네트워크도 잘 발달되어 있다. 때문에 이 집단은 정치 참여가 활발하고 선거를 비롯한 정치적인 영역은 부유층의 입장을 대변하는 방향으로 진전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곳간에서 인심난다위의 모델을 우리나라 속담에 빗대보면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말이다. 현대적 표현으로는 강남 아이들이 공부도 잘할 뿐 아니라 착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전통적 설명은 부유층이 향유하고 있는 자원의 절대량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즉, 양적 비교였다. 하지만 인간 행동에 대한 연구가 확대되면서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요인에 영향을 미치는 조건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사회경제적 조건SES(social economic status)은 자원의 양으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는 접근이다. 곳간은 물질만이 아니라 인간이 처해있는 전체적 조건인 셈이다.
기존 자원모델이 참여자원(돈, 시간, 참여기술) 등 객관적, 실체적 자원의 양적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 카네만 등 행동경제학의 배경에서 출발한 새로운 관점은 자기자원(self-resources)과 그를 소모시키는 부정적 감정에 주목한다. 이를 자원이론과 출퇴근 스트레스이론으로 구분하여 자유시간의 양적 차이를 야기하는 노동시간과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켜 자기자원(self-resources)을 소모시키는 출퇴근시간이 정치적 관심과 정치참여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비교한다.
이 연구에서는 이를 증명하기 위한 가설을 세우고 데이터를 통해 이를 검증한다.
가설 1. 의무적 일상업무(출퇴근시간)이 정치적 의지/관심(개입요인)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가설 2. 여기에는 경제적 격차가 영향을 미친다.(상쇄요인) 가설 3. 정치적 관심이 정치참여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결과)이를 검증하기 위해서 조지타운대학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센터에서 수행한 2005 시민의식, 참여, 민주주의 조사 Citizenship, Involvement, Democracy Survey(CID) 결과 590부를 활용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노동시간이 정치 참여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반면, 출퇴근 시간·공동체에 대한 태도, 중위가구소득 비율 등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론적으로 연구에서는 시간소모측면에서 노동시간보다는 불쾌한 부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출퇴근시간이 정치의식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는 것과 그 효과는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감소해, 최고 소득구간의 사람들의 경우 오히려 부정적 영향보다는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나라는?우리나라 노동조건은 어떠한가? 한국의 출퇴근시간에 대한 직접적 자료는 찾기 어렵다. 일단 2011년 OECD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출퇴근 시간은 55분으로 남아공 다음으로 높다. 2009년 10세 이상 서울시민의 이동 시간은 평일 1시간 54분, 취업자의 출퇴근 소요시간은 평일기준 1시간 35분으로 조사되었다.
대신 시민역량과 사회적 신뢰 영역에서는 41개 조사국 중 공정한 법제도는 하위 7위,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하위 10위, 하위 3위이다. 또한 자원봉사 등 사회적 활동에 쓰는 시간은 1시간으로 헝가리, 인도 다음으로 낮았다.
연구는 정치참여연구와 미국 시민의식과 민주주의를 위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먼저, 연구는 시민역량강화에 대한 일상적 업무의 영향력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노동과 출퇴근의 영향을 구분해서 분석함으로써 기존 연구를 진전시켰다.
또한 실제 노동시간보다는 불쾌한 경험을 주는 출퇴근 시간의 영향에 주목한다. 더구나 인지심리적 자원을 소모시키는 환경·조건의 중요성과 적절한 해소수단, 노동시간 중 자기결정권, 노동의 질 등에서 자원이 부족한 저소득층에서 이 문제가 더욱 크게 증폭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녁이 없는 시민은 민주주의를 할 여력이 없다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잘못된 주거·부동산 정책으로 서민들은 외곽으로,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다. 역세권 주거비용은 지나치게 높아 소득이 낮을수록 출퇴근 시간이 길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런 저소득층은 노동현장에서 보내는 시간에서도 불쾌한 감정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임금뿐 아니라 주야간노동, 작업장에서의 위계, 자기결정권, 기본적 복지 등은 매우 취약하다. 이런 상황에 몰려있는 서민층들이 자신을 위한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선거 이후, 저소득층과 복지 수혜층인 노인들의 투표행태에 대해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일각에서는 투표참여를 위해 투표 시간 연장, 투표방식 전환 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선거당일 투표권 행사의 문제가 아니다. 내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고민하고 적당한 정치집단을 선택하며 주변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과정이 민주주의이다. 출퇴근시간과 노동시간이 지나치게 힘들어 인지심리적 자기자원이 전부 소모된 노동자와 저소득층, 취약계층이 민주주의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일면 당연한 결과이다.
덧붙이는 글 | 이은경 기자는 새사연 연구원입니다. 이 기사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새사연 www.saesayon.or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재가공된 것이므로 완결된 보고서를 보고싶으신 독자는 새사연 홈페이지 방문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