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은 세계인권선언(1948년)이 UN회원국들에 의해 프랑스 샤이오궁에서 채택된 지 65주년이 된 날이었다. 어차피 한국에서는 일부 인권운동가와 소수의 관심 있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날이긴 하지만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켜기만 하면 쏟아져 나오는 최근 이 나라의 다종다양한 인권문제들은 65년 전에 만들어진 전문(前文)과 30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선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게 만든다.
세계인권선언은 편의상 기본권, 시민권, 정치권, 사회권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기도 하지만 조항 하나하나가 압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서로 간에 의미로나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몇 조항만 읽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의 쓰라린 경험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인권기준의 미래사회를 위해 탄생한 이 30개의 인권조항이, 65년이 지난 오늘날 한반도의 남쪽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의미로 읽혀질까 하는 것이다.
자고나면 새로운 문명의 이기와 사상이 새로 탄생하는 오늘날은 말할 것도 없지만 수십억 년의 지구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고 가장 많은 인류사의 변화가 일어난 시기가 20세기와 21세기의 초입인 지금까지라는 것은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간 내인 1948년부터 2013년까지 세계인권선언 65년의 역사 또한 의미 있게 되뇌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48년 12월 10일에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은 제 아무리 명문(名文)이고 고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해도 2013년인 오늘에 와서 보면 곰팡내가 나는 한 물 간 단어와 의미로 이루어진 문장이라는 비판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1948년에 만들어진 시대적 한계가 엿보이는 'Brotherhood', 'sex' 등과 같은 단어의 빈번한 사용이 눈에 거슬릴 뿐만 아니라 내용이 너무 서구 중심적이라는 공격 또한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문(前文)과 30개의 조항 하나하나가 역설하는 권리의 목록은 2013년 12월, 지금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면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때와 비교해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대해 분노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왜 그러한지 우선 세계인권선언 1조 만이라도 현미경을 들이대고 우리의 현실을 맞대어 살펴보도록 하자. 세계인권선언 1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계인권선언 제 1조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과 권리는 모두 똑 같다. 사람에게는 이성과 양심이 있으므로 서로 상대방을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우리가 투표해서 뽑았을 뿐인 공무원인 박근혜 대통령이나 299명의 국회의원, 한 시민인 나 모두 세계인권선언 1조의 내용과 같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그분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반도체나 핸드폰 등을 팔아서 천문학적인 돈을 버는 이건희씨의 경영능력을 칭송하고 인정하는 나라라면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리인 노동조합설립도 당연히 노동자의 권리로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또 삼성의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투병하거나 죽어간 노동자들의 존엄과 권리 또한 똑같이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건희씨나 삼성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인간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과 권리가 모두 똑같다'라는 세계인권선언 1조의 주장이 맞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권선언 65주년 기념일인 지난 12월 10일, 삼성그룹 내 각종 비인권적인 노동조건을 바꾸기 위해 '삼성노동인권지킴이'란 단체가 출범한 것으로 봐서는 현실이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벌금을 내지 못해서 교도소를 가는 시민들이 한 해 4만 명을 넘는데 수백, 수천억의 회사 돈을 횡령한 재벌회장은 그 많은 돈으로 여태 건강관리를 어떻게 한 건지 툭하면 아프다며 재판받으러 올 때도 휠체어나 이동 침대이고, 재판이 끝나도 호텔과 다름없는 대학병원 특실에 입원해 있는 상황은 더욱더 사람의 존엄과 권리가 똑 같다는 조항에 대해 쓴 웃음을 짓게 만든다.
지금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불과 10여전 전에 전임 대통령이 TV에서 한 말을 꼬투리 삼아 불공정 선거를 획책한다며 탄핵까지 몰고 갔던 정당이다. 그런 당에서 지난 대통령 선거기간동안 정보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여당후보를 돕기 위한 수백, 수천만 개의 댓글공작에 대해서는 여전히 '개인적 일탈' 운운하며 책임이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며 나는 과연 '사람에게는 이성과 양심이 있으므로...'라는 65년 전의 인권선언의 문구에 대해 깊은 회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국회의원 개인의 신념에 따라 부정선거에 대해 대통령이 책임지라고 주장한 야당 국회의원에 대해서 새누리당은 일치단결해서 제명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에 대해 '상대방을 형제애(자매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라는 고상한 조항은 들이밀기조차 민망할 뿐이다. 단지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라고 믿는다는 전제아래 제명결의안을 제출한 국회의원들에게 세계인권선언 18조와 19조를 제발 찬찬히 읽어보시기를 간곡히 권유한다.
세계인권선언 18조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의 자유,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에는 자신의 종교 또는 신념을 바꿀 자유도 포함된다. 또한 이러한 권리에는 가르침, 실천, 예배 의식을 행함에 있어서, 혼자 또는 다른 사람과 함께, 공개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자신의 종교나 신념을 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된다.세계인권선언 19조 모든 사람은 의사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에는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자유와, 모든 매체를 통하여 국경을 뛰어넘어 정보와 사상을 모색하고 받아들이고 전파할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된다.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이 글을 읽게 될 정부 여당 관계자들은 세계인권선언 29조의 의무와 제한 규정을 들며 권리와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9조의 내용인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심과 공중질서 그리고 사회전체의 복리를 위해 정당하게 필요한 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제정된 법률에 의해서도 제한을 받을 수 있다.(29조 2항 후문)"는 조항은 오히려 툭하면 '종북' '빨갱이' '제명'을 외치며 무분별한 자유를 한껏 즐기고 계신 당신들에게 필요한 조항이라고 말하고 싶다.
전문(前文)과 30조의 인권조항 중에서 1조만을 들춰서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봤을 뿐인데도 내용 없는 글이 길어졌다. 강정과 밀양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는 주민들, 쌍용자동차와 대전의 원자력연구원을 비롯한 전국의 수많은 해고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제 막 철도민영화반대를 위해 파업을 시작한 철도노동자들의 주장은 세계인권선언이라는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다. 그런데도 이 추운 겨울날 산에서, 거리에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올 뿐이다. 65년 전에 만들어진 세계인권선언의 권리조항 하나하나에도 아직까지 부끄러워해야 하는 2013년 대한민국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