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의 업무를 마감하는 금요일 저녁, 저는 주위의 회사 동료와 다른 주말을 계획합니다. 다들 주말에 무엇을 할지, 어디를 갈지, 누구를 만날지 고민합니다만, 저는 주말에 텃밭에서 해야 할 일을 정리합니다. 봄에는 주로 심을 것에 대해, 여름에는 수확과 함께 제초가 가장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풀이 한풀 꺾이는 가을에는 거두고 가꾸는 데 공을 들여 계획을 세웁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이 저의 일입니다. 사업을 기획하고, 통계 데이터를 주무르고, 신사업의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손가락을 많이 사용하지만 기계적인 수단에 불과하고 주로 머리를 사용하게 됩니다. 토요일이 되면 저의 이중생활이 시작됩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놓고 대신 낫과 호미를 듭니다. 이때는 머리를 쓸 일이 거의 없습니다. 머리가 수단이고, 손과 발이 주역이 됩니다.
저는 이중생활을 매우 즐깁니다. 그렇다고 회사일과 농사일을 병행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선 시골집이 서울 근교가 아니라 강원도 홍천입니다. 서울집에서 90km가 조금 넘습니다. 주말 교통체증을 피해 오고 가는 일이 가장 고된 일입니다. 농사일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농사는 때를 맞추는 것이 절반이라고 합니다만, 주말에만 농사지으며 시기를 잘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일요일 저녁, 금주에 꼭 해야할 일을 남겨두고 서울로 향하려면 아무리 자연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한 농사를 짓는다고는 하더라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경작 면적을 줄이는 것이 대안입니다만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이럴 때는 주중에도 자꾸 시골일들이 오버랩됩니다. 금요일은 더욱 더디 오기만 합니다.
가끔 이중생활을 정리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회사를 그만 두고 아예 귀농을 결행하는 것이죠. 언제가 분명히 그렇게 할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중생활을 하기 때문에 각각의 생활이 즐거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말에 자연과 함께하는 노동이 있기 때문에 주중 도시에서의 머리 쓰는 일도 그럭저럭 스트레스 없이 견뎌냅니다. 반대로 회사일도 농사일에 도움이 됩니다. 아무리 텃밭 가꾸는 것을 좋아해도 일년 내내 하는 노동은 몸을 지치게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일주일을 이틀과 닷새로 나눠 서로 상반된 일을 하는 이중생활이, 서로 길항하며 오히려 두 영역에서의 만족도를 증가시키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게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한 해를 보내고 농한기를 맞이 하였습니다. 주변 회사 동료들은 농한기란 말에 웃음을 짓습니다만 저로서는 정말 농한기를 실감합니다. 소홀했던 책도 읽고 맛있는 것도 해 먹으며 주말을 보냅니다. 시골집에 가도 좋고 서울집에 있어도 괜찮습니다. 작년까지는 겨울에도 가족과 함께 의무적으로라도 시골집으로 가려고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좀 더 유연해진 것이죠. 서울이든 시골이든 가족과 함께 즐겁게 지낼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주말을 보내면서 간식으로 먹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텃밭에서 나온 식재료로는 고구마, 땅콩, 감자, 호박 등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호박, 정확하게 말하면 늙은 호박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저 같이 어수룩한 주말농부에게 늙은 호박은 피할 수 없는 결과물입니다. 때를 맞춰 수확할 수 없는 것은 운명과도 같습니다. 한여름 호박이 익어가는 속도는 놀랍습니다. 이삼일 뒤에 따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애호박도 그 다음 날 보면 훌쩍 자라 있습니다. 그런 녀석들을 장장 5일 동안이나 못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 둘 거둘 시기를 놓친 녀석들이 어느새 농구공이나 럭비공만해져 풀 속에서 자리를 잡아갑니다. 그러던 9월의 어느 날, 마음을 먹고 풀을 베어 두둑을 덮는, 소위 멀칭이라는 것을 하다 보니 누렇게 변한 호박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습니다.
21세기 초입, 다들 늙음을 두려워 합니다. 늙음은 경제력과 노동력 상실을 의미하고, 그런 늙은이는 곧 무용지물로 치부됩니다. 그리하여 늙어도 늙어 보이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머리에 염색도 하고 보톡스도 맞고요. 인간 세상과 달리 자연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당하죠. 저는 늙은 호박을 보며 당당함을 생각했습니다. 더 단단해 지고, 품위가 있고 말이죠. 거기다가 쓰임새도 젊은 애호박보다 더 다채롭습니다.
가장 흔한 용도는 역시 식재료입니다. 호박죽이 대표적입니다. 아내가 만드는 것을 지켜보니 참 쉽습니다. 껍질을 베끼고 알맞게 썰어 솥에 넣고 물을 적당량 넣어 끓이면 99%가 완성됩니다. 소금과 설탕을 좀 넣어 간을 맞추는 것으로 1%를 마무리를 합니다. 따뜻하게 먹어도 좋고 시원하게 먹어도 그만입니다. 지금이 동짓달이니 일년 중 가장 밤이 길죠. 이 긴긴 밤의 야식으로는 김장김치를 곁들인 호박죽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늙은 호박을 채로 썰은 다음 밀가루와 버무려 부침개를 해 먹어도 일품입니다. 여름이면 주체할 수 없이 나오는 애호박으로 부침개도 해먹고 호박만두도 해 먹습니다만 늙은 호박으로 이렇게 해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지난달 김장하면서 처형이 요리한 늙은 호박 부침개를 보니 시각과 후각을 모두 매료시키더군요. 노릇 노릇한 색감으로 시각을 잡고, 은은한 호박향으로 후각을 잡아 결국엔 미각을 동요시킵니다.
우리 딸 아이가 좋아하는 호박조청도 가능합니다. 겨울마다 장모님이 만들어 주시는데, 어끄제 전화드려 보니 아직 콩을 고르는 중이라 못하고 계시다네요. 지금 비닐하우스에서 호박을 썰어 말리고 있다고 하시니 올해는 옆에서 도와 드리면서 만드는 과정을 꼭 봐둬야겠습니다.
호박으로 먹는 것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잘 생긴 맷돌 호박은 인테리어로도 훌륭합니다. 저희 집의 경우, 책꽂이 한 칸은 호박이 차지했습니다. 물고기 수조 옆에도 한개가 덜렁 있구요. 아이들 방에도 있습니다. 딸애는 자기 방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부여하여 방문 앞에 두고, 축구를 좋아하는 아들 녀석은 책상 밑에 두고 공을 만지듯 발로 만지작 거리며 공부를 합니다. 어떤 용도로든 우리 가족이 합심하여 농사를 짓고, 그 농산물을 나몰라라 하지 않고 아끼고 좋아해 주면 아빠로서는 그 만한 기쁨이 없습니다.
아이들과 만드는 공예품의 재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잭오랜턴(Jack O'Lantern)을 만들고 아빠에게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할로윈의 상징물로 알려져 있죠. 아이들이 이렇게 저렇게 자기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게 하고 엄마가 자르는 것을 도와주면 됩니다. 초를 넣고 호박안을 들여다 보니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다만, 이렇게 한번 썰린 호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2~3일 아이들과 즐겁게 놀고 난 후에는 빨리 먹거리 재료로 활용해야 합니다.
늙은 호박은 선물로도 훌륭합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친척이나 가까운 지인에게 하나씩 선물하면 다들 좋아합니다. 쉽게 마트에서 구입한 것 보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특히, 직장과 병행하며 지은 농사의 결과물이라서 더 좋아해 주지 않나 싶습니다. 스토리텔링 성격이 있는 것이죠. 이달에 회사에서 진행하는 바자회에도 하나 출품할까 합니다. 높은 가격으로 낙찰이 이루어질 것으로 낙관합니다.
사람이나 호박이나 일생은 다 비슷합니다. 태어나고, 자라고, 열매 맺고, 늙고, 생을 마감하고 말이죠. 1년이냐 80년이냐, 길고 짧음의 차이가 있으나, 그 또한 우주라는 관점에서 보면 찰나에 불과한 한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호박이 그러하듯 사람도 나이를 먹는 것을 애석해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서 당당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년에도 저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시골집으로 향할 것입니다. 이중생활을 만끽하면서 말이죠.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http://www.oh-moo.com)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