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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가 도입된 것은 대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심포지엄 참가자들
심포지엄 참가자들 ⓒ 이상기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5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1편의 보고가 있었다. 논문의 일관된 주제는 "일본과 한국의 기독교 수용사"였고, 보고는 아마쿠사의 기독교 유적을 세계유산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들 중 4편은 일본의 천주교 관련 내용이고, 2편은 한국의 천주교 관련 내용이었다. 가장 먼저 야마우치 료헤이(山內亮平)의 <아마쿠사의 보물을 세계유산으로>라는 보고가 있었다.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것은 16세기 동서 문화교류와 천주교의 번성을 보여주는 나가사키와 아마쿠사의 천주교 문화유산이다. 옛 성터, 역사적인 경관, 교회 건축물이 대상이다. 그 중 중심이 되는 것은 역시 교회건축물이다. 아마쿠사에도 사기츠 집단부락(崎津集落)과 오에무라(大江村), 토미오카(富岡)에 있는 키리시탄 공양비가 있다. 이들 문화유산이 2012년 6월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구성자산이 되었고, 2015년 세계유산 등재를 기대하고 있다.

 서양의 대포를 응용해 만든 일본식 대포
서양의 대포를 응용해 만든 일본식 대포 ⓒ 이상기

<아마쿠사 5인방과 대포 그리고 천주교>를 발표한 나카야마 게이(中山 圭)는 천주교 수용의 1차적 목적이 대포였다고 말한다. 1560년 스모토(栖本)성에서 스모토, 사가라(相良) 진영과 시키(志岐), 가미츠우라(上津浦), 아리마(有馬), 오무라(大村), 마츠우라(松浦) 진영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마츠우라가 대포부대를 파견해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 대포가 포르투갈로부터 들어온 사실을 안 시키 린센(志岐麟泉)이 1566년 선교사 알메이다 신부를 초빙하게 되었다. 그는 바로 세례를 받았고, 그의 영지에 있는 사람들도 천주교도가 되었다.

1570년 시키는 서양의 배들이 찾아오는 중요한 항구가 되었고, 선교사들의 포교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알메이다 신부는 대포를 만들 수도 없었고, 대포를 만들 수 있도록 중재해 주지도 않았다. 이에 시키는 천주교를 버리게 된다. 이에 1569년 천주교에 입문한 고우치우라(河內浦)의 아마쿠사 요시타네(天草尙種)가 시키씨를 대신해 천주교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의 목적도 역시 무역선의 내왕으로 이익을 얻고 무기를 획득하는데 있었다.

 오에 천주당
오에 천주당 ⓒ 이상기

1577년에는 30개 이상의 교회가 지어졌고, 1580년에는 고우치우라, 혼도, 구다마(久玉)에 사제가 상주하기도 했다. 아마쿠사의 천주교도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1587년 7월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선교사 추방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쿠사 지역에서는 영주들이 계속 천주교로 개종함으로써 천주교도가 계속 늘어났다. 1589년 아마쿠사 5인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반기를 들기도 했다. 1592년 도요토미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으로 해서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약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마쿠사의 천주교는 계속 확장되었고, 1592년 경 아마쿠사는 큐슈에서 천주교 포교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되었다. 당시 아마쿠사에는 60개의 교회와 33,000명의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쿠사 하면 많은 일본사람들이 천주교를 떠올린다고 한다. 그것은 1637/38년의 아마쿠사 시마바라난을 이끈 아마쿠사 시로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그보다 한두 세대 앞서 천주교를 수용하고 보급한 아마쿠사 5인방의 공도 큼을 알아야 한다. 

대신학교인 콜레지오가 아마쿠사로 이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발표자: 왼쪽부터 나카야마, 도리츠, 길경택, 히라다.
발표자: 왼쪽부터 나카야마, 도리츠, 길경택, 히라다. ⓒ 이상기

도리츠 료지(鳥津亮二)는 <16세기말 아마쿠사로의 콜레지오 이설>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아마쿠사로 콜레지오가 옮겨질 수 있었던 것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아마쿠사 히사타네(天草久種)의 화해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도리츠는 일본 내에서 고니시에 대한 최고 전문가이다. 그럼 이 두 사람은 어떻게 천주교 문제에 대해 서로 화해할 수 있었을까? 사실 아마쿠사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정치적 영향 하에 있었다.

1589년 아마쿠사 5인방의 반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아마쿠사 히사타네는 고니시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그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1591년 초 고니시와 아마쿠사가 무로츠(室津)에서 회담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전제로 화해한 사료가 있기 때문이다. 1591년 히사타네는 학원, 수련원, 신학교로 이루어진 콜레지오를 자신의 영내로 이전하기를 간청하는 편지를 고니시에게 보낸다. 그리고 그것이 수용되어, 시마바라의 가츠사(加津佐)에 있던 콜레지오가 아마쿠사의 고우치우라(河內浦)로 이전된다.

잠복했다 부활한 일본의 천주교, 그러나 지금은...

 일본 천주교의 수용을 도표화해 자세히 설명하는 히라다 도요히로
일본 천주교의 수용을 도표화해 자세히 설명하는 히라다 도요히로 ⓒ 이상기

히라다 도요히로(平田豊弘)는 <아마쿠사 잠복 천주교도와 신앙의 양상>을 발표했다. 그는 탄압과 잠복 그리고 재포교라는 관점에서 신앙의 양상을 도표화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는 탄압과 잠복을 금교의 시대로, 재포교를 부활의 시대로 보기도 했다. 히라다 실장은 천주교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을 아마쿠사 시마바라난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난후 아마쿠사 대관(代官)이 된 스즈키 가문의 완화된 종교정책 덕에 천주교가 잠복하거나 불교로 자연스럽게 개종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한 연표나 통계자료에 의하면 천주교가 가장 번성했던 사기츠, 오에, 이마토미(今富) 지역에는 1805년까지 천주교 신자의 비율이 60-70%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비율은 1805년 '아마쿠사의 붕괴'라는 이름의 이단종교 신봉자 적발사건을 통해 확인된다. 여기서 이단종교란 천주교를 말한다. 이때 확인된 천주교 마을의 인구와 잠복 키리시탄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잠복 신도수가 5205명에 이르렀다.

 사기츠 천주당
사기츠 천주당 ⓒ 이상기

       마을                 총인구     잠복 신도    잠복신도 비율     총 호수     잠복 호수
오에무라(大江村)        3,143        2,132              68%               569          441
사기츠무라(崎津村)     2,401        1,710              71%               209          불명
이마토미무라(今富村)  1,836        1,047              57%               156          불명
다카하마무라(高浜村)  3,320          316              10%                579           88

다행히도 이단종교 신봉자로 적발된 이들 카쿠레 키리시탄은 마음의 자세를 위반한 죄로 가볍게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키리시탄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1873년 천주교 금교령이 풀리고, 1877년 말만 신부가 순회선교사로 아마쿠사를 방문했다. 1884년 이 지역을 방문한 페리에(Ferriee) 신부는 모두 453명의 신자가 있다고 보고했다. 오에 142명, 사기츠 244명, 이마토미 67명이다. 80년이 흐르는 동안 신도수가 1/10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그럼 그동안 잠복 키리스탄은 어떻게 변했을까? 히라다 실장은 이들 대부분이 불교의 선종이나 정토종으로 갔고, 일부는 신도(神道)로 갔다고 말한다. 오에의 경우는 어촌과 농촌으로 나뉘는데, 어촌 지역 사람들은 결국 선종과 정토종 같은 불교를 택했다. 이에 비해 농촌 지역들은 잠복 키리시탄 일부가 끝까지 남아 그리스도교의 부활을 이끌었다. 사기츠는 어촌 지역인데, 이들 중 상당수가 잠복 키리스탄으로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이에 비해 농촌 지역인 이마토미는 대부분 선종과 신도로 넘어가고 67명만이 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집에서 모시는 신전
일본 사람들이 집에서 모시는 신전 ⓒ 이상기

그러나 지금 일본의 천주교 신자수는 44만명 정도로 전 인구의 0.35%가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일본 최대교구인 도쿄교구에 9만5000명 정도, 두번째로 많은 나가사키 교구에 6만3000명 정도의 신도가 있다. 그나마 나가사키 교구의 천주교 신자비율이 높아 4.3% 정도 된다. 아마쿠사가 속한 후쿠오카 교구에는 30,000명 정도의 신자가 있어 신자 비율이 0.39% 정도 된다.

그리고 아마쿠사의 혼도, 오에, 사기츠 천주당에 등록된 신도수는 664명으로 알려져 있다. 혼도 115명, 오에 321명, 사기츠 228명이다. 현재 아마쿠사시의 인구가 8만4835명이니 신자비율이 0.79%쯤 된다. 그렇다면 지난 100년 이상 아마쿠사의 천주교 신자가 200명 정도 늘어난 것에 불과하다. 이게 지금 일본 종교의 현실이다. 일본 사람들은 서양 종교가 아닌 불교와 신도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천주교는 어땠을까?

 조선의 천주교에 대해 발표하는 도쿠나가 교수
조선의 천주교에 대해 발표하는 도쿠나가 교수 ⓒ 이상기

조선의 천주교에 대한 발표는 초창기 천주교의 전래와 수용 그리고 신앙공동체의 형성에 맞춰졌다. 도쿠나가 교수는 충청도 지방 천주교 포교를 위해 노력하다 순교한 이존창(李存昌: 1756-1801)을 중심으로 충남 내포지방 천주교의 수용을 다뤘다. 그리고 길경택 실장은 순교자 이국승(李國昇: 1772-1801)을 중심으로 천주교의 충주 전래를 다뤘다. 이존창과 이국승은 모두 실학과 천주학에 매료된 진보적인 지식인들로 목숨을 바쳐 믿음을 증거했다고 볼 수 있다.

이존창은 유복한 양인계급 출신으로 20대에 이벽, 이승훈, 권철신 형제를 통해 서학을 알게 되었다. 이들과 교류하면서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의 사제가 되어 충청도 내포지방의 전교활동에 앞장섰다. 1791년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고통을 겪었고, 1801년 신유박해로 처형되었다. 그는 서학인 천주학을 지식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충주 관아에 있는 순교자 현양비
충주 관아에 있는 순교자 현양비 ⓒ 이상기

이국승은 신유박해 때 처형된 인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시성을 요청한 126위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충주에서 살았으며, 경기도 양근의 권일신을 방문해 교리를 배우고 신자가 되었다. 그는 형조에서 다음과 같이 최후 진술을 했으며, 그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801년 7월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어 순교했다.

"지난 10년 동안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 이미 고질병 같이 되었습니다. 비록 형벌을 받아 죽는다 할지라도 신앙을 믿는 마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일찍이 충주에서 체포되었을 때는 혹독한 형벌을 이기지 못해 '마음을 바꾸겠다'는 뜻으로 말하고 석방되었지만, 이는 저의 본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천주교 수용사#잠복과 부활#대포#콜레지오#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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