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은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공판이 있는 날이다. 김용판, 한때 수도 서울의 경찰을 대표하던 사람이다. 그러던 김용판 전 청장이 부정선거 축소수사 몸통이 되어 버렸다. 범죄를 척결하던 수장이 피고가 되어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평생을 경찰에 몸바쳐 온 사람으로서 그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하지 않다. 한때 그도 정의로운 경찰이 되겠노라 다짐했을 터이다.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진실을 추구하며, 어떠한 불의나 불법과도 타협하지 않는 의로운 경찰이다."현직 경찰에 있을 때 가슴에 새겨 둔 경찰윤리강령 중 일부이다. 자랑스러운 경찰이 되기 위해, 정의로운 경찰이 되기 위해 내 가족과 국민을 지키기 위해 가슴에 품고 다니던 말이다.
아직 수많은 후배들은 이 말을 가슴에 품고 뼈가 시리도록 추운 겨울 밤, 잠도 자지 못한 채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현장에서 뛰고 있을 것이다. 그런 후배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격무와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정의와 진실을 지킨다는 사명감 하나로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 경찰의 마지막 자존심인 '정의'가 김용판 한 사람으로 인해 한 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처해있다.
1년 전 12월 16일 밤 11시, 서울경찰청은 국정원 불법선거 의혹에 대해 "디지털증거분석 결과, 10월 1일부터 12월 13일까지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나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에 대한 비방, 지지 게시글이나 댓글을 게재한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평생 경찰에 몸담았던 사람으로 경찰의 발표를 믿을 수 없었다. 우선 수사요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시글이나 댓글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어떤 경로로 어떤 작업에 의해 밝혀진 사실인지 근거를 명확히 해야 한다. 모든 수사는 증거가 바탕이다. 근거와 증거 없는 수사는 허위다.
경찰에 몸담았던 사람으로 경찰 발표 믿을 수 없었다또, 나는 30여 년 동안 경찰 생활을 했지만 단 한 번도 밤 11시에 수사결과를 발표한 기억이 없다. 더 큰 문제는 그날 발표가 최종수사 발표도 아닌 중간수사 발표였다는 사실이다. 불과 49시간 후면 대통령 선거가 시작된다. 최종수사도 아니고 명확한 근거도 없이 부정선거 사실이 없다고 서둘러 발표한 것은 수사관행을 떠나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모종의 음모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서울경찰청의 발표는 허위로 판명됐다. 심지어 수사를 지휘하던 수사과장에게 외압을 행사하고, 드러난 부정선거의 증거를 은폐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외압의 몸통은 김용판 전 청장으로 모아졌다. 김용판 전 청장에게 묻고 싶다.
"부정선거를 은폐하는 것이 정의의 이름인가? 불법을 파헤치는 후배 수사관에게 전화를 걸어 겁박하는 행위가 경찰이 지켜야 할 진실인가? 정말 당신은 어떤 불의나 불법과도 타협하지 않는 의로운 경찰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당신은 정의롭지 않다. 당신은 진실하지도 않다. 당신은 불의와 불법과 타협한 비리 경찰이다. 당신 한 사람의 범죄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말살했다. 정의를 불의로 갈음하고, 불법이 합법으로 세탁되고 있다. 당신은 무엇보다 정의와 진실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살아 온 이 땅의 정의로운 경찰들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서치뷰>가 조사한 내용(2013.11.19~20)에 따르면 박근혜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 중 9.7%는 '경찰이 사실대로 밝혔다면 문재인 후보를 찍었을 것'이라고 한다. 박 후보 득표수(1577만 표)로 환산하면 153만여 표다. 김용판 전 청장은 국민과 민주주의를 기만했다. 기만 당한 국민과 민주주의는 부정과 불법 정권을 탄생시켰다. 불법으로 시작된 박근혜 정부가 지금 대한민국 역사를 후퇴시키고 있다.
아무리 덮고 왜곡해도 역사의 진실마저 속일 수는 없다. 아무리 속이려 해도 범죄자 자신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전직 경찰이었던 김용판 전 청장 스스로 잘 알 것이다.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다. 단지 완전범죄를 꿈꾸는 범죄자만 있을 뿐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한때 죄를 좇던 사람으로서 이 말은 잘못됐다. 죄를 짓는 것은 죄가 아닌 사람이다. 죄를 뉘우치는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되지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사람조차 용서할 수는 없다. 난 단 한 번도 김용판 전 청장이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반성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법의 이름으로 단죄하고 심판해야 한다.
그럼에도 김용판 전 청장을 비판하는 가슴은 아프다. 어쩌면 마지막 남은 동료애인지도 모른다. 한때 동료로서 진심으로 부탁드린다. 경찰을 시작하던 초심으로 돌아가 국민을 위해, 진실과 정의를 위해 경찰의 사명감을 되찾기를 바란다. 나는 진심으로 김용판 전 청장을 용서하고 싶다. 용서를 하기 전 용서를 비는 것이 우선이다.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을 듣고 싶다. '권력의 겁박에 불의와 불법과 타협했노라'는 진실어린 참회의 고백을 듣고 싶다. 비겁한 변명과 발뺌이 아닌 전직 고위 경찰로서의 마지막 남은 당당한 기개를 보고 싶다. 추락한 스스로의 명예는 물론이고 빼앗긴 경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유린당한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역사를 위해서라도 부디 부정선거의 진실을 낱낱이 밝히고 국민 앞에 참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 30년 동안 경찰에 근무한 사람으로서 김용판 전 청장의 문제를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어서 글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