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이어 블루로 채색된 하늘은 가없이 높았다. 두고 온 바다가 그리워졌다. 고향 흑산도의 검푸른 바다 그리고 제주도 강정마을의 시리게 푸른 바다. 바다같은 하늘, 하늘같은 바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립고 아련한 것들은 모두 파란색을 하고 있다.
약속은 없었지만, 더블린 시내에 나가보기로 했다. 덧없이 유랑하기에 좋은 하늘빛이었고, 생크림을 빼고 커피를 추가한 진한 카페모카 한 잔을 마시고 싶기도 했다. 오전 11시 40분쯤, 리피강을 따라 달리던 시내버스가 하페니 다리(Ha'penny Bridge) 승강장에 나를 내려줬다.
아일랜드 민족운동가인 다니엘 오코넬... 아일랜드만의 자치 의회 꿈꿔 건널목을 건너면 오코넬 거리(O'Connell Street). 아일랜드 민족운동가인 다니엘 오코넬(Daniel O'Connell, 1775~1847)의 이름을 땄다. 더블린 시민은 물론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더블린의 번화가다.
다니엘 오코넬은 남부러울 것 없는 가톨릭 지주였다. 18세기 당시만 하더라도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신자가 소유한 땅은 15%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어떤 성장배경을 지녔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 그를 아일랜드 민족운동사의 한복판으로 끌고 간 것은 1801년 영국이 제정한 소위 '연방법'. 이 법에 따라 영국은 아일랜드의 의회를 해산하고 아일랜드를 '정식으로' 식민 속국으로 만들었다.
오코넬은 영국이 '연방법'을 철회해 아일랜드만의 자치 의회가 다시 열리기를 꿈꿨다. 즉 독립보다는 자치를 원한 것이다. 압박수단으로는 대중 집회를 활용했다. 1843년에 오코넬이 주도한 '몬스터 회의'에는 아일랜드 전역에서 5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영국의 강경하고 단호한 조치 앞에선 한없이 나약하기만 했다. 그는 영국에 대항해 무력투쟁을 할 의사가 없었다. 심지어 예고했던 집회를 영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취소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서서히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식민지 자치운동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사람들은 시내 중심거리가 시작하는 지점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한계가 있었을지언정 그의 저항이 아일랜드 독립을 향한 밑돌이 되었음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존경하기 때문이다.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 자체로 역사 안에서 연대하려는 자세가 끝내 승리하는 새로운 역사를 가져온 건 아닐까.
오코넬 거리는 직경 약 550m로 끝에서 끝을 걸어도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더블린 시민들이 약속 장소로 즐겨 이용하는 오코넬 거리는 오늘도 정오의 약속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미리 도착한 사내는 행동 굼뜬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서두르라고 다그친다. 스무 한 두 살이나 되었을까, 금발의 여성은 '어떻게 얘기할까' 가볍게 초조해진 눈으로 승강장을 바라보고 있다. 가볍고 살가운 일상의 풍경들이 밝은 수채화처럼 펼쳐지고 있는 거리.
이 무탈한 일상의 거리는 지난 시절 항쟁의 거리였다. 광주 금남로처럼 말이다. 금남로에 항쟁을 상징하는 옛 전남도청이 있듯 오코넬 거리엔 중앙우체국이 있다.
1916년 4월 24일, 일단의 무장한 아일랜드인들이 더블린 시내에 있는 주요 시설들을 점령한다. 무장봉기군은 약 2000명으로, 주도 세력은 교사이자 변호사였던 패트릭 피어스(Patrick Pearse)가 이끄는 '아일랜드 의용군(Irish Volunteers)'이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사회주의자로 구성된 '아일랜드 시민군(Irish Citizen Army)'도 함께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들이 무장봉기를 시작한 날이 부활절 주간이어서 이를 '부활절 봉기'라 한다.
오코넬 거리에 있는 중앙우체국을 점령한 무장봉기 세력은 이곳을 총사령부로 정한다. 그리고 무장봉기 세력을 대표해 패트릭 피어스가 한 장의 선언문을 낭독한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새로운 나라 '아일랜드 공화국(Irish Republic)'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무차별 포격하자 봉기군 결국 항복... 부활절 봉기 기간 사망한 이 500명 하지만 봉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시민들은 "무슨 독립?"하며 비웃었고, 영국군은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봉기 7일째이던 30일, 영국군이 봉기세력의 총사령부였던 중앙우체국을 무차별 포격하자 봉기군은 결국 항복하고 만다.
부활절 봉기 기간에 사망한 이는 약 500명. 아일랜드 독립을 외치며 봉기에 가담했거나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투옥된 이는 약3000명이었고, 봉기에 참여했던 이 중 100여 명이 사형을 선고받아 그 가운데 패트릭 피어스 등 15명이 총살을 당했다.
처참한 패배였다. 아일랜드 독립은 산산이 부서진 중앙우체국 건물처럼 다 깨져버린 듯 했다. 시인 윌리엄 예이츠의 노래처럼 "너무도 오랜 희생은 가슴 속에 돌을 박는" 것일까. 무참한 패배는 더 강력하고 질긴 투쟁으로 부활했다.
패트릭 피어스가 못다 이룬 꿈은 마이클 콜린스가 이어갔고, 투옥된 자들은 감옥에서 전사로 거듭났으며, 봉기를 비웃었던 시민들은 전사들의 숲이 되어 그들을 영국군으로부터 보호했다. 2년 후인 1918년엔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Irish Republican Army)이 창설되고, 3년 후인 1919년 1월부터 독립전쟁을 시작한다. 독립전쟁은 1921년 7월 영국과 휴전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휴전은 아일랜드가 독립국가로 태어나는 출발선이 되었다.
더블린 중앙우체국 건물엔 지금도 실탄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수많은 독립의 역사, 민주주의 역사에 피가 묻어있지 않은 것이 없다.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도 일제 식민을 온몸으로 거부한 독립전사들의 죽음과 피의 대가로 세워졌다.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제나라 군대에 학살당한 광주시민과 고문당하고 죽어가면서 민주주의를 외친 수많은 이들의 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죽음과 피로 일궈온 민주주의를 정보기관과 군대가 희롱하고 짓밟았다.
이 기 막힌 꼴을 지켜보고 있을 금남로는 안녕한가. 지역차별의 조롱과 수모를 견뎌내며 한국 민주주의를 건사해온 광주는 안녕한가. 그리고 무엇보다 정보요원과 군인들에게 공작 당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안녕한가.
무겁게 어슬렁거리는 마음처럼 오코넬 거리에 시나브로 어둠이 내린다. 중앙우체국 앞에 서있는 첨탑 '스파이어(Spire of Dublin)' 주변이 저녁 약속을 준비하는 이들로 분주해졌다. 스파이어는 오코넬 거리에 있는 여러 상징물 중 사람들이 약속 장소로 가장 많이 정하는 곳이다.
높이가 121.2m인 스파이어는 아일랜드의 새로운 천년을 기념해 설계되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공사가 지연돼 2003년에 완공되었다. 원래 이 자리엔 영국의 제독 넬슨 기념비가 서있었다. 더블린 시내 한복판에 세워진 넬슨 기념비는 아일랜드를 식민 통치했던 영국의 위상 그 자체였다. 아일랜드가 독립국가로 거듭난 이후에도 넬슨 기념비가 그대로 서있자 많은 비판과 공격이 잇따랐다.
1955년 10월 29일에는 더블린의 대학생들이 화염방사기로 넬슨 기념비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1966년 3월 8일에 오전 1시 32분, IRA는 "영국 식민 통치의 상징을 그대로 세워두는 것은 아일랜드의 자존심을 짓밟는 것"이라며 넬슨 기념비를 폭파해버린다.
스파이어를 완공하며 당시 더블린 시장은 "파리 에펠탑과 뉴욕의 자유여신상처럼 스파이어도 더블린의 랜드 마크가 되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그의 바람대로 스파이어가 더블린의 랜드 마크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시민들의 약속 장소로는 확실하게 자리매김 했다.
하지만 주변 건물보다 7배 이상이나 높게 치솟은 뾰족한 첨탑에서 아일랜드의 질긴 생명력을 느끼긴 힘들다. 마치 한국의 88고속도로 지리산 휴게소에 날카롭게 세워진 '전승탑'을 보는 것처럼 생뚱맞다. 세상 아무리 높은 탑도 하늘 아래서는 한낱 점일 뿐이다. 최고, 최대를 만들어 격을 높여보겠다는 어설픈 심산을 뒤로 한 채 리피 강은 오늘도 낮게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