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니 어떠시던가요?"영화관 밖으로 나오자 누군가가 내게 그리 물었다. 그러나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영화는 분명 감동적이었고 또 이제까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훌륭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았지만 그 느낌을 성급하게 내뱉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행여 내가 감동이니 뭐니 하면서 입 밖으로 말을 내보내면 영화의 진 맛이 달아날 것 같아 두렵기도 했고 또 한 편으로는 그리 말하는 것 자체가 영화를 모독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변호인>은 뭐라 보탤 말이 필요 없는 영화였다. 어떤 감상평도 사족일 뿐이며 영화의 한계를 넘어선 영화가 바로 <변호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우리 둘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입을 꾹 다문 채 말없이 자기 생각 속에 들어가 있었다.
<오마이뉴스>의 초청, 두 말 않고 응했다
"<변호인>을 같이 보지 않으실래요?"라는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의 초청을 받았을 때 두 말 하지 않고 응했던 것은 남편과 함께 하는 데이트가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장안에 온통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이니 꼭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동지 의식을 느낄 수 있는 데이트가 될 것 같아서 더 기대가 컸다. 영화의 시대적인 배경인 1980년대에 우리 역시 젊은이였고, 또 먼저 가신 그 분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 부부인지라 어떤 영화보다 더 공감하며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요즘 누구를 만나도 <변호인>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꼭 나온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주로 40대가 많은데 그들 대부분은 영화를 꼭 볼 거라는 말을 하곤 했다. 나 역시 <변호인>을 일부러 검색해서 자료를 찾아볼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그 영화는 모두의 마음 속에 들어있던 정의감을 불러 일으켰다.
어떤 이는 고등학생인 아들과 함께 보고 왔는데 또 보러 갈 거라고 했다. 어떤 점에 끌려서 본 영화를 두 번씩이나 보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언니,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감동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영화가 변호인이에요" 하면서 먼 곳으로 눈길을 보냈다. 그 말을 하는 그이에게서 뭔가 모를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배어있는 듯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사람들의 마음을 이토록 흔들어놓는 것일까. 과연 나도 감동과 벅찬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상암동으로 갔더니 나와 같은 마음으로 온 사람들이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우리 모두는 한 깃발 아래 모였다. 그것은 '시작은 언제나 한 사람이지만 마침내는 큰 강을 이룬다'는 깃발이었다.
1980년대,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영화는 억지를 부리지도 않고 강요를 하지도 않았다. 절제된 대사와 감정이 오히려 증폭 작용을 해서 보는 내내 부르르 전율이 오곤 했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고 몰아쉬었다. 그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앞자리에서도 또 옆자리와 뒷자리에서도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영화를 같이 본 모든 사람들이 마치 한 사람이라도 된 양 같이 느끼고 또 같이 전율을 했다. 우리는 모두 한 마음으로 영화 속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도 모르게 영화가 끝났다.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라도 시계를 보며 언제 끝나나 재어보곤 하는 버릇이 있는데 <변호인>은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기 바쁘던 남편 역시 오늘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다. 화면에는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끝없이 위로 올라왔다. 이렇게 훌륭한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니 그 분들의 이름을 다 봐주는 게 도리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경의를 표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 분들의 용기와 정성으로 이 영화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감상을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왠지 모르지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시대적인 배경인 1980년대, 그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저토록 정의를 위해 온 몸으로 싸운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는 편한 길만 걸어왔구나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또 저렇게 해서 얻은 소중한 가치들을 지금 우리가 잘 지키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화표를 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벅찬 마음을 그대로 간작하고 싶어서였다. 시끄럽게 떠들면서 말을 주고받으면 벅찬 마음이 달아날 것 같았고 또 성급하게 입을 놀려서 말을 하면 감동이 반감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황황히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일산대교를 건너 김포로 넘어오자 비로소 우리 둘은 입을 뗐다. 그러나 말은 길지 않았다. 부러 말하지 않아도 둘이 느꼈을 마음은 비슷했을 터이니 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고 남편이 말했다. 그런 사람을 우리 시대에 만난 것도 행운이고 또 그 분이 우리의 대통령이었던 것도 행복이었노라고 그는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마이뉴스>에서 받은 메시지를 본떠서 "<변호인> 영화표 제가 쏩니다" 라고 통 크게 말했다. 내 뒤를 이을 사람들이 분명 또 나올 것 같다. 그들 역시 나와 다름없는 감동과 벅찬 가슴을 안고 영화관을 나올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제 <변호인>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메시지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