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호인>이 개봉 8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묵직하고 의미있는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제작사 측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허구임을 강조하고 '절대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객들은 변호사 송우석(송강호 분)에게서 노무현을 본다. 상식이 실종된 세상에서 그는 상식을 말한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라고 외치는 송우석에게서 관객은 1980년대 초가 아닌 2013년의 대한민국과 마주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고 서글픈 현실이다.
내 직업은 '맛칼럼니스트'다. 음식이라는 도구를 통해 시대와 사람의 삶을 톺아보고 이를 글로써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영화 <변호인>을 보는 내내 송우석이 먹던 돼지국밥에 관심이 쏠렸다. 왜 하필 돼지국밥일까?
부산 출신의 시인 최영철은 "돼지국밥에는 쉰내 나는 야성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시장바닥은 곳곳에 야성을 심어 놓고 파는 곳"이라 했다. 주류 사회에 진입했으나 학벌 때문에 영원히 비주류에 머물 수밖에 없는 송우석의 삶은 그런 돼지국밥의 '쉰내 나는 야성'을 닮았다. 술집 '삐끼'마냥 명함을 돌리며 바닥부터 박박 기어올라 시대의 양심을 대변하는 변호인이 된 송우석의 삶의 궤적은 '시장바닥의 질펀한 야성'을 떠오르게 한다. 아울러 돼지국밥은 송우석에게 잠재되어 있던 '야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송우석이 먹던 돼지국밥도, 송우석이 돼지국밥집 아들을 변호하게 되는 것도 영화에서의 설정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문득 송우석이 아닌 노무현이 먹었던 음식이 궁금해 졌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프랑스의 미식가, 브리야 샤바랭"무엇을 먹느냐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독일의 철학자, 포이에르바하정확하게 동시대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200여 년쯤 전에 많이 먹어 본 미식가와 많이 생각한 철학자가 비슷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현재까지도 유효한 명제로 인용되고 있다. 따라서 개인이 선호하는 음식 속에는 출신지역·성장환경·종교·품성 등 다양한 단서가 내포되어 있다. 어떤 음식은 즐겨 먹느냐는 것은 선택의 문제고, 그 선택 속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또한 음식은 추억이고 때로는 기억의 매개체다.
이러한 음식의 역할을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조명해 보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언론 보도, 서거 이후 출간된 자서전과 추모집, 그리고 현장 취재 과정에서 만난 그의 흔적들을 통해 '인간 노무현'을 만나 보기로 한다.
연거푸 여섯잔, 노무현이 반한 막걸리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위경련을 앓았다. 가난한 집안 환경과 강한 자의식이 충돌하면서 생긴 질병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위경련은 고시 공부를 할 때도, 판사 변호사 시절에도 그를 괴롭혔다. 다행히 정치를 시작한 이후에는 증세가 사라졌다. 그래서인지 술을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었고 와인이나 막걸리 한두 잔 마시는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퇴임 전·후로 막걸리를 마시는 모습을 자주 접한 많은 국민들은 '술 잘 마시는 대통령'으로 그를 기억하곤 한다. 그만큼 '촌놈' 노무현의 막걸리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특히 충북 단양의 '대강막걸리'는 대통령이 반한 막걸리로 유명하다. 2005년 5월 21일 충북 단양군 가곡면 한드미 마을을 방문한 노 전 대통령은 그 고장의 명물이라며 대접받은 막걸리를 "참 맛있다"며 여섯 잔이나 연거푸 마셨다.
이후 그 맛을 잊지 못해 직접 블라인드 테스트까지 해서 '대강막걸리'를 청와대 만찬주로 선정했으며, 주요 행사 때마다 "아주 맛이 좋아 계속 이것을 쓰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이러한 일화는 2007년 하인즈 워드 선수의 청와대 방문을 계기로 세간에 알려졌다.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대강막걸리 측은 퇴임식 날 봉하마을로 막걸리 2000병을 보냈고 얼마 후 노 전 대통령은 답례로 인삼을 선물했다. 전임 대통령이 보내준 귀한 선물을 영원히 보관할 방법을 고민한 대강막걸리의 조재구 사장은 인삼주를 담갔다. 이 인삼주는 지금도 양조장 사무실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
퇴임 후에는 김해의 '상동탁주'가 유명해졌다. 노사모 회원들과 농사일을 끝낸 후 새참과 함께 상동탁주를 맛 본 노 전 대통령은 "지방 막걸리도 수도권 막걸리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맛이 훌륭하다"고 칭찬했으며, 이날 이후로 새참 전용주로 간택(?)했다. 김해 토박이들이 오래 전부터 즐겨 온 상동탁주는 개운한 청량감과 달콤한 과실향이 잘 어우러졌을 뿐만 아니라 잡맛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마무리 또한 훌륭한 술이다.
막걸리와 노무현의 인연은 사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서거 직전까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고향 봉하마을의 친환경농업은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려 2010년 가을 세번째 수확을 거두었고 그 결실로서 '봉하쌀 생막걸리'가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생산량이 한정되어 봉하마을에서만 만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국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아울러 봉하막걸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바보주막'이 협동조합 형태로 곳곳에 문을 열고 있다. 비록 고인은 그 맛을 보지 못했지만, 그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에게 귀한 선물을 남기고 간 셈이다.
사법시험 준비 시절, 토담집서 먹던 삼계탕 잊지 못해노 전 대통령은 좋아하는 음식란에는 반드시 '삼계탕'을 적었다. 그만큼 삼계탕과 얽힌 일화가 많다. 군대를 제대하고 마을 앞 산기슭 토담집에서 사법시험 준비를 하던 시절, 아내가 마늘을 듬뿍 넣고 고아온 삼계탕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고 회고하곤 했다.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삼계탕 전문점으로 꼽히는 서울시 종로구 체부동의 '토속촌'은 노 전 대통령의 단골집으로 소문이 나면서 더욱 인기가 높아졌다. 토속촌과 노 전 대통령의 인연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으며, 1998년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 출마했을 당시에는 선거 참모들이 수시로 모여 토론을 갖던 장소다. 재임 시절에도 종종 들렀으며, 취임 첫해에 있었던 재계 총수와의 간담회 역시 토속촌에서 가졌다.
워낙 장사가 잘되는 집이다 보니 경호와 의전 등의 문제로 수시로 들를 수는 없었을 터. "삼계탕 만드는 법을 토속촌에 가서 배워오라"는 노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청와대 직원이 방문했으나, 주인이 이를 거절했다는 일화는 토속촌의 유명세를 더욱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참여정부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일까. 노 전 대통령 퇴임 후 토속촌은 국세청에 의해 세무조사를 받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감자와 옥수수'를 간식으로, 라면도 즐겨 먹어재임 당시 대통령의 일상적인 식사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궁금해 했다. 하지만 외부로 알려진 내용은 그닥 많지 않다. 대통령의 개인적인 기호가 알려지면 해외순방이나 외부행사 때 그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 노 전 대통령 내외는 평상시 간식으로 고구마·감자·옥수수 등을 즐겼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각 해외 공관에서는 대통령의 순방 때마다 고구마와 옥수수를 준비해 놓기도 했다.
청와대 운영관(주방장)으로 근무했던 신충진 요리사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삼계탕·붕어찜 등 서민 음식을 좋아했으며 여의도에 있는 '부산복집'의 복어를 좋아하셔서 가끔 사다 드렸다"고 한다.
한 번은 막창구이를 냈더니 "내가 이 음식을 좋아하는데 진작 해달라고 할 걸 그랬네"라는 정도의 감상을 피력했을 뿐, 별도로 음식을 주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밀가루 음식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노 전 대통령은 "약 먹으면 되니까 신경 쓰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차리라"고 지시했다.
일 주일 내내 고생하는 운영관을 배려해 일 요일이면 고구마와 라면으로 내외가 직접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고 한다. 특히 해외 순방이나 입맛이 없을 땐 라면을 즐겼다. 공군1호기에서 부인 권양숙씨와 함께 라면을 먹는 사진이 서거 후 공개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가 즐겼던 고향의 맛2008년 2월 25일 퇴임식 후 고향 김해로 내려간 노 전 대통령은 환영식장에서 큰 소리로 "야~ 기분 좋다!"라고 외쳤다. 이 말처럼 그는 그해 봄부터 여름까지 재임 시절보다 더 많은 인기와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심경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해양수산부장관 시절 방문했던 진해 용원의 '김해횟집'을 퇴임 후 다시 찾았다. 수많은 유명 인사들의 사인지 속에서도 노 전 대통령의 남긴 글이 유난히 눈에 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생각이 나서 토왔네. 2008. 5. 31 노무현"이라고 적혀있다.
전직 대통령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탈권위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또왔네'가 아니고 '토왔네'다. 이정도 맞춤법도 몰랐을리는 없었을 터, 관계자가 전하는 사연이 재미있다. 방문했던 날이 마침 토요일이라 그렇게 썼다는 것이다. '또'를 '토'로 쓰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한바탕 웃음을 안겼을 장난기 어린 표정이 왠지 낯설지 않다.
봉하마을에 정착한 노 전 대통령은 행사 때마다 마을 부녀회원들이 만든 쇠고기국밥을 즐겨 먹었다. 이 국밥은 서거 후 조문객들에게도 제공됐는데, 국민장 기간 동안 사용된 쇠고기의 양만 무려 5톤에 이를 정도였다. 지금도 봉하마을 '테마식당'에 가면 그 유서 깊은 쇠고기국밥을 맛 볼 수 있다.
삼계탕 못지 않게 즐겼던 음식은 추어탕이었다고 한다. 2008년 가을 산딸기농장을 방문했던 노 전 대통령은 연락도 없이 김해시 상동면 매리에 있는 '할매추어탕'을 찾았다. 가마솥에 끓여낸 맑고 개운한 경상도식 추어탕과 소박한 찬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할매추어탕'은 순식간에 김해의 명물 음식점이 되었다.
노 전 대통령과 가장 인연이 깊은 고향의 음식은 메기국이다. 봉하마을과 화포천으로 이어져 있는 김해시 한림면 안하리의 '화포메기국'은 고향에 정착한 노 전 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첫번째로 찾은 음식점이다. "메거지(메기의 김해 사투리) 맛이 옛날 그대로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몇 번 다녀 갔다고 한다.
하지만 보좌진과 경호원을 대동할 수밖에 없는 신분이다 보니 다른 손님들께 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발길이 그리 잦지는 않았다. 대신 '찜통'을 보내와 사가는 경우가 많았다. 식당 입장에서는 전임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단골'이라는 이유로 내용물과 양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를 하루 앞둔 2009년 4월 29일. 그날도 메기국이 담긴 찜통이 봉하마을로 배달됐다고 한다. 심경이 복잡했을 그가 메기국을 먹었는지 어땠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화포메기국에 대한 애정만큼은 각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영원한 '촌놈' 노무현, 그의 국밥 사랑
앞서 언급한 브리야 샤바랭과 포이에르바하의 말을 다시금 떠올려 보자. 좋아하는 음식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이 좋아했던 음식을 정리하고 보니 유난히 국밥류가 많다. 국밥은 원래 적은 양의 재료로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기 위해 만들어진 전형적인 농촌 음식이고 서민 음식이다.
거기다 막걸리 한 사발이라도 곁들이면 노동으로 지친 몸을 잠시나마 달래 준다. 노 전 대통령은 국밥과 막걸리가 가진 이러한 정서를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굳이 서민 친화적인 연출을 하지 않더라도 그는 영원한 '촌놈'이다. 또한 강과 지류와 평야가 이어진 김해는 민물고기로 만든 국을 유난히 즐겨 먹는다. 추어탕과 메기국을 즐겼던 그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김해사람'이다.
청와대 운영관이었던 신충진 요리사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가리는 음식 없이 어떤 음식이든 귀하게 생각하고 정성 들여 먹었다"고 한다. 아울러 직원들의 대기 시간이 길어지지 않도록 정해진 식사 시간을 반드시 지키려 했고, 식사 도중에 반찬이 떨어지더라도 "맛있던 것도 계속 먹으면 맛이 없어진다"며 더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 음식에 대한 예의 물론이고 인간의 대한 배려까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소설가 김훈은 "밥은 삶이며 정서이다. 밥은 추상이 아니다. 밥은 개인의 목구멍을 넘어갈 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무늬 지어주고 시대의 억압과 고통 속에서 뜸이 든다. 밥은 서정이며, 또 서사인 것이다"라고 했다. 뼛 속까지 서민이고 자연인이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음식들을 돌이켜 보니, 김훈이 말한 밥의 의미가 더욱 새삼스럽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 '취생몽사'(http://landy.blog.me/)와 <김해뉴스>에 실렸던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