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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탄광지역이었던 강원도 정선 사북의 학교로 발령이 났다. 석탄합리화 정책이 막 시작되던 1980년대 말부터 5년 간 근무한 후 20여년이 지나고 다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완전히 폐광되었지만 탄광촌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사북, 고한 일대의 석탄 관련 자료를 찾고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석탄의 역사를 정리해왔다. 석탄의 역사는 곧 광부(광산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삶이었다. 그 과정을 연재 기사로 옮겨본다. - 기자말.  

"문 열고 나오다 처남댁 보는 앞에서 그냥 엎어졌어. 연탄가스 땜에 그런 줄도 모르고 처남댁은 몹쓸 병이 있어 그런 줄 알았대."


면서기였던 외삼촌이 서원면으로 발령이 나 이사를 가게 되어 짐 옮겨주러 갔던 아버지는 이사 끝내고 사랑방에서 잠을 자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었다. 천만 다행으로 문을 열고 나왔기에 더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문풍지가 잉잉대던 한겨울. 아버지의 얘기를 듣던 어머니는 천지신명이 도우셨다며 눈물을 흘렸다. 

연탄 때문에 아버지를 잃을 뻔 했다

면 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시골 우리 마을에는 연탄을 때는 집이 없었다. 배달도 안 될 뿐더러 나무를 해다 때는 산골 사람들이 연탄을 사서 쓸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연탄은 구경조차 못했다. 그런 연탄 때문에 아버지를 잃을 뻔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마음 한 귀퉁이에 연탄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하게 되었다.

 원주 밥상공동체 사랑의 연탄나누기 벽화
원주 밥상공동체 사랑의 연탄나누기 벽화 ⓒ 이기원

연탄에 대한 두려움이 재현된 건 고등학교 때였다. 친한 친구가 여동생과 함께 자취방을 얻어 자취하면서 학교를 다니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여동생은 죽고 친구는 후유증으로 왼손 신경이 마비되어 제대로 움직이지 못 하는 지경이 되었다. 연탄이 난방의 주 연료로 사용되던 시절 연탄가스 중독으로 화를 당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겨울철 뉴스에 단골 메뉴처럼 연탄가스 중독 사고로 화를 당했다는 소식이 등장할 정도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연탄은 많은 사람들의 겨울나기에 꼭 필요한 연료였다. 겨울철, 광에 연탄 그득히 들여 놓아야 든든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많은 연탄을 한꺼번에 들여놓지 못 했다. 형편 대로 조금씩 사다 쓰거나 당장 필요한 연탄 두어 장씩 새끼줄에 묶어 사들고 와 힘겹게 겨울을 났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달동네에는 연탄 들여놓기도 힘들었다. 연탄집 아저씨가 리어카에 연탄 가득 싣고 동네 입구에 도착하면 온 식구들이 다 동원되어 세숫대, 양동 등에 연탄을 담아 날랐다. 세숫대야에 서너 장씩 담아 가파른 비탈길 오르다보면 팔이 떨어질 듯 아파 주저앉은 적도 많다.

새하얀 함박눈이 푸짐하게 내려 달동네 비탈길이 빙판으로 변하면 사람들은 연탄재를 부수어 깔았다. 검은 연탄 세숫대야에 담아 옮길 때는 깨트리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일이지만, 희뿌연 재로 변한 연탄재 빙판길에 깔 때는 함부로 차고 밟아 부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딱 한 시인만 빼고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중에서 -

 연탄재
연탄재 ⓒ 이기원

탄광촌 신혼 생활

1980년대 말 첫 발령지가 함백이라는 탄광촌이었다. 앞산과 뒷산을 연결해서 빨랫줄을 걸어도 될 정도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좁은 골짜기에 시커먼 석탄을 실어 나르는 철길 따라 길게 형성된 마을에는 한창 경기 좋던 탄광촌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무렵 정부의 석탄 합리화 정책이 구체화되면서 5년 동안 탄광촌의 쇠락 과정을 지켜보며 생활했다. 학교 일 중에도 전학 업무가 많았다. 탄광촌이 쇠락하면서 새로운 삶터를 찾아 탄광 지역을 떠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전셋집 잘 못 구해 들어갔다가는 전세금도 돌려받지 못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첫 발령지 함백, 아내와 첫째, 기찻길 따라 길게 늘어선 골짜기 탄광촌이었다.
첫 발령지 함백, 아내와 첫째, 기찻길 따라 길게 늘어선 골짜기 탄광촌이었다. ⓒ 이기원

이런 이유로 탄광촌 함백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우리 부부의 보금자리는 3만 원 월세 방에서 시작되었다. 연탄 보일러 방이었는데, 연탄을 갈아본 적이 없는 새내기 신부는 뜨겁게 달궈진 아궁이 뚜껑을 보일러 호스 옆에 두고 연탄을 갈다 호스에 구멍을 낸 적도 있다. 추운 겨울 밖에 나가 연탄 가는 일이 싫어 시간이 되면 서로 나가라고 등 떠밀며 아웅다웅 대던 기억도 새롭다. 

조그만 창문을 장롱으로 막아 대낮에도 어두웠던 방에 혼자 있는 게 무서워 동네 아이들 데려다가 놀던 아내는 남편 돌아올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산골짜기 탄광촌이라 신혼부부 손잡고 갈 만한 마땅한 곳도 없었다. 퇴근 후 등산 겸 뒷산 절골에 가거나 예미역 부근 삼겹살집 들러 삼겹살 구워 밥 먹고 돌아오는 정도였다. 

 석탄 경석 무더기에서 주워온 화석
석탄 경석 무더기에서 주워온 화석 ⓒ 이기원

탄광촌에서 첫 아들 낳아 기르며 살다 원주로 발령이 나서 이삿짐 트럭에 싣고 오던 날 아내는 "시내로 가면 FM 라디오 방송도 마음 놓고 들을 수 있고, 아이가 아프면 데려갈 약국과 병원도 가까워 너무 좋다"며 들떠 있었다. 

들뜬 아내 곁에 앉아 차창 뒤로 밀려나는 탄광촌을 돌아보면서 이제 가면 다시 와서 살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을 했다. 탄광촌 신혼 생활이 많이 힘들었던 아내가 두 번 다시 이런 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탄광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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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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