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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그리 오래지 않은 1988년으로 기억한다. 한사코 '국사는 암기과목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선생님이 계셨다. 수업이 시작될 때마다 그날 진도와 상관없이 되뇌셨는데, 장난기 가득한 몇몇 아이들은 인사가 끝나면 그 선생님의 표정과 목소리를 흉내내기도  했다. 연도와 사건, 인물 등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야할 것들 뿐인데 암기과목이 아니라니, 대부분의 아이들은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라며 내심 비웃었다.

수업이 여느 국사 선생님들과는 다르긴 했다.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옛 이야기 들려주듯 수업을 하셨는데, 푹 빠져 듣다보면 한 시간이 쏜살 같이 지나갔다. 마치 어릴 적 동화구연 시간 같았다. 교과서를 읽어가며 '밑줄 쫙, 별표 땡' 하던 수업에 익숙해 있는 우리들에게 참신한 느낌은 주었지만, 시험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나 두려움도 컸다. 공부깨나 하던 아이들 중에는 대놓고 모의고사 등 시험에 도움이 안 된다며 투덜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긴 한정된 수업시간에 그렇듯 '여유'를 부리다보니, 교과서의 모든 내용을 다루기는 어려웠다. '넷 중 하나만 고르라는 단순무식한 시험에는 당장 도움이 안 될 수는 있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라 호기롭게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수업 방식을 고집했다. 아무튼 선생님의 '예상대로' 모의고사 등에는 도움을 못 받았지만, 일단 흥미로웠고 매번 나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감동적인 수업이었다.

'교과서를 의심하라'니... 놀랐고, 두려웠다

 국민교육헌장.
국민교육헌장. ⓒ 역사문제연구소 제공
그 분의 '어록'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다. 당시로선 누구나 당연시했기에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라 적잖이 놀랐고, 조금은 두렵기까지 했다. 뒤늦은 고백이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방과 후 집에 달려가 '저 선생님 혹시 간첩일지도 모른다'며, 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신고(?)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공방첩'과 '멸공통일'이라는 글귀가 전봇대와 담벼락 여기저기에 붙어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왜 교과서 맨 앞에 태극기와 국기에 대한 맹세, 그리고 국민교육헌장이 적혀 있어야 할까? 혹시 그 글귀를 외우며, 속뜻을 찬찬히 음미해본 적 있니? 혹시 너희들 중 그것들이 언제, 왜 제정되었는지 아는 사람 있니?"

명색이 고등학생이었지만 그때까지 그것들에 대해 단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태극기는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될 성스러운 것이었고,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헌장은 수시로 외우면서 우리 국민들의 국적을 증명하는 절차 같은 것이었다. 교과서는 흑백에다 누런 갱지였지만, 태극기와 맹세, 그리고 국민교육헌장이 적힌 종이는 희고 빳빳한 컬러판이었던 것도 그런 이유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심을 해보라니. 순간 깜짝 놀랄 만큼 '불경스러운' 말이었지만, 그것은 미래 나의 전공과 직업을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 선생님이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고, 또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역사 공부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시험 성적은 변변치 않았지만, 자문자답해가는 과정이 마냥 신이 났고, 끔찍히도 싫어했던 연도를 외우는 것조차 즐거웠다. 무기력했던 학교생활이 활기차게 변한 건 덤이었다.

그 분은 그해 학교에서 쫓겨났다. 왜 그랬는지는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야 알게 됐지만, '철밥통' 교사도 교과서에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을 가르치거나 그것에 의심을 가지면 무사하지 못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교사는 국가가 정해준 내용과 절차를 따라 한 치의 벗어남 없이 가르쳐야 하며, 그 공통된 '매뉴얼'이 바로 교과서였던 거다. 물론,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지만, 여기서 국가란 정권과 동의어다. 예나 지금이나.

교사, 그것도 한국사 교사가 된 지금, 나 역시 그분이 던졌던 질문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할 순 없다. 태극기 그림은 삭제됐고, 국기에 대한 맹세는 그 내용이 크게 바뀌었다. 국민교육헌장은 아예 자취를 감춰 내용은커녕 그 이름마저 역사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학창시절 십 수년 간 매 맞아가며 외운 터라, '우리는 민족중흥의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그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교훈은 남았다. 교과서의 역사 서술을 끊임없이 의심하라는. 그것이야말로, 저 유명한 역사학자 카(E. H. Carr)가 설파한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또, 그것은 '국사는 암기과목이 아니'라는 선생님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증거이며, 교사가 된 지금 매 수업시간 교단에 오르기 전 무슨 주술외듯 잊지 않고 되뇌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교육부 국정교과서 회귀... 역사가 두렵지 않나

교학사 교과서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인 "왜곡된 역사 교사서 폐기하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와 교학사 교과서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인,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검정무효화 국민네트워크 회원들이 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친일·독재를 미화하는 교학사 교과서 폐기와 서남수 교육부 장관의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인 "왜곡된 역사 교사서 폐기하라"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와 교학사 교과서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인, 친일·독재미화 뉴라이트교과서 검정무효화 국민네트워크 회원들이 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친일·독재를 미화하는 교학사 교과서 폐기와 서남수 교육부 장관의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갑자기 30년 가까이 지난 학창시절의 '추억'이 떠오른 것은, 교육부가 한국사 교과서 제작의 모든 과정에 사전 개입하겠다는 어이없는 뉴스를 접하고서다. 사라졌던 교육부 내 한국사 편수조직을 다시 꾸리겠다는 것인데, 사실상 국정 방식에서 검인정 체제로 바뀐 지 불과 서너 해 만에 다시 회귀하겠다는 발상이다. 교학사 교과서의 채택과 철회 과정의 혼란을 '물 타기'하고, 친일과 독재를 미화한 교과서 내용을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처절한 몸부림 아닌가.

이는 우선 학자들의 역사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부정하는 몰역사적 퇴행이다. 학문은 학계에 맡겨야 옳지, 칼춤을 추며 얼토당토 않는 억지를 부려서야 되겠는가. 덩달아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분단 상황에서는 국정교과서가 필요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마저 스스럼없이 내놓고 있다. '물 타기'도 유분수지, 이젠 이미 사회적 합의가 끝나 사라진 제도까지 다시 되살리려하니 측은함마저 들 지경이다.

'일베' 파문과 전교조 법외노조화 갈등, 그리고 교내 대자보와 교학사 교과서 문제까지 연이어지면서 지난해 학교는 단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대학교수들은 지난해를 '도행역시(倒行逆施)'라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일선 고등학교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엉망진창이 됐다. 얼마 전 아이들의 대자보가 교내 면학분위기를 훼손한다며 생활지도를 강화하라는 교육부의 공문에 모두가 분개한 건 그래서다. 적반하장이라는 거다.

돌고 돌아 국정 교과서 체제로 회귀하자는 주장까지 나온 마당이다. 저들의 반동이 어디까지 갈지 이젠 도무지 종잡을 수조차 없다. 대학 총장까지 지낸 분이 '차라리 유신시대가 좋았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 세태이고 보면, '식민지 시절이 그립다'는 이야기가 저들의 입에서 회자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어쩌면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역사의 대가를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치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 자리에서 '올해 비정상을 정상화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교학사 교과서를 어떻게든 살리고, 한국사 편수조직을 꾸리겠다는 교육부의 발표에 대입해보면, 대통령이 말한 '비정상의 정상화'란 결국 검인정 체제를 폐지하고 국정 교과서로 가겠다는 뜻 아닌가. 나아가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에 대해 미화한 역사를 받아들이라는 압력에 다름 아니다.

불과 1년 만에 우리 사회를 수십 년 전으로 퇴행시켜버린 현 정권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교육부의 연이은 반교육적 작태는 수많은 교사들로 하여금 교육부의 존재 이유 자체를 의심케 한다.

장담하건대, 교육부가 정권의 입맛에 맞는 교과서를 만들자고 기어이 한국사 편수조직을 꾸린다면, 그것은 식민지 시절 일본의 조선 침략과 강점의 합법성을 입증하기 위해 사료의 취사선택과 왜곡을 자행하고,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의 목적에 이용하려 한 조선사편수회와 하등 다를 바 없었다고 후세는 기억할 것이다. 현 정부는 역사가 두렵지 않나.


#교학사 교과서#교과서 편수#국정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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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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