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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살수 무영객은 강호의 전설적인 비급 무극진경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은거한 고수 모충연을 암습한다. 모충연은 일격을 당한 후 제자 관조운에게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남긴 채 운명한다. 한편 황실의 비밀조직 은화사 역시 무극진경의 강호 출현을 눈치 채고는 관조운을 추격한다. 관조운은 살수와 은화사에게 이중으로 쫓기면서 스승 모충연이 가르쳐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 필자말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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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게. 그림은 정말로 불에 타서 없어졌다네. 그러니 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하겠나."

"대협, 왜 이래? 내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기는 처음이야.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어. 그림을 내놓던가 하다못해 그림의 행방이라도 말해."

무영객의 목소리가 무딘 못으로 쇳덩이를 긁는 소리처럼 변했다.

"……"
모충연이 입을 꾹 다물었다.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입가에 고였다.

"할 수 없군. 말을 하지 않겠다면 당신의 머릿속을 헤집어서라도 내가 끄집어 내지."

무영객이 품속에서 손바닥만한 가죽보를 꺼냈다. 가죽보를 펼치자 각종 침이 새벽빛을 받으며 은색으로 반짝였다. 무영객은 그중 가장 굵은 대침과 가장 가는 세침을 꺼내 모충연의 눈앞에서 살살 비볐다.

"잠혼술이라고 들어봤소? 전통침술에서는 사문방외술(邪門方外術)이라 하여 경원 시 됐지만, 그래도 우리 같은 방외술사들에겐 면면히 이어져 왔지. 이것의 뛰어난 효능은 단 하나. 몇 개의 침이 골 속 깊이 박히는 순간, 시술자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거야. 눈앞에는 딴 세상이 펼쳐지지."

모충연은 잠혼술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강호인들이 무공과 더불어 가장 가까이 지내는 잡학이 바로 의술이다. 무림인들에게 부상은 백년해로를 맺은 부부처럼 항상 따라다니는 동반자이기에 의술은 곧 무공의 내조자 역할을 한다. 의술에서도 여러 유파가 있지만 그 치유의 목적과 효능에 따라 정도와 사술로 나눈다. 잠혼술은 의술에서 출발했지만 그 목적이 변질된 사술로 강호에서는 금기시 되고 있는 방외술인 것이다.

"으음, 악독하구나. ……이보게, 무극진경은 사실 실재하는 것이 아니네. 사부 태허진인께서 진경을 집필하시긴 했지만 완성을 이룬 건 아닐세. ……적어도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야."

모충연이 터져나오는 공포와 고통을 악물며 말을 했다.

"그럼, 그림의 행방이라도 말해"
"그, 그림은 ……불에 탔어."

무영객은 왼손으로 유엽도를 손목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더니 허공을 한번 쓰윽 갈랐다. 모충연의 상투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이내 머리카락이 스르륵 뱀처럼 어깨위로 흘러내렸다. 무영객은 산발이 된 모충연의 머리를 매만지며 씨익 웃었다.

"과연 그럴까. 이제 대협은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저절로 말하게 될 터이니."

무영객은 큰 대침을 모충연의 두개골 뒤쪽 승령(承靈)혈에 찔러넣었다. 모충연의 입에서 크흐흐흐 하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무영객은 아랑곳않고 중침 두 개를 양쪽 옥침(玉枕)혈에 쑤셨다. 모충연은 비명조차 나오지 않은 채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자, 이제 하나 남았어. 대협의 혼은 이제 나에게로 넘어오는 거지."

무영객은 가늘디가는 극세침을 하나 뽑았다. 그는 왼손 검지로 모충연의 두개골 꼭대기를 살살 어루만지며 조심스럽게 눌렀다. 마침내 찾았다는 듯 검지의 움직임을 멈추고 오른손가락으로 극세침을 잡고 백회혈에 조금씩 밀어넣기 시작했다. 극세침은 모충연의 백발 속에 심어진 또 하나의 머리카락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아무런 초점 없이 허공만 바라보았다.

"대인, 계십니까?"

이때 대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며 말소리가 들렸다. 무영객은 흠칫하고 동작을 멈추었다.

"모 대인 어른, 연 장문인께서 급한 용무로 잠깐 뵈었으면 하는 전갈을 전하고자, 소인 천개가 찾아왔습니다. 아직 주무시는지요?"

이번에는 좀더 큰소리로 대문 밖에서 소리쳤다. 무영객은 극세침을 살짝 뽑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깊숙이 박아넣었다. 모충연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대협, 운이 좋군. 하필이면 이럴 때 훼방꾼이 나타나다니. ……지난 보름 동안 이 시간대를 지켜봤었는데."

무영객은 창밖을 장지문을 쳐다보며 유엽도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방문객을 공격할 자세다.

"대협, 다시 오겠어. 극세침은 내가 아니면 아무도 뽑아낼 수 없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진경의 요결이나 그림의 행방을 생각해놔. 알지? 누구에게도 발설을 했다간 대협은 백회혈부터 썩어들어 갈 거야. 강호인 사이에 고결하기로 소문이 났던 일운상인의 말년이 노망들린 노인네처럼 추하게 되면 안 되겠지."

쾅, 쾅, 쾅, 이번에는 대청마루가 울릴 정도로 천개는 문을 두드렸다. 그래도 아무런 기척이 없자 천개는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새벽잠이 없을 노인인데다 자면서도 십리 밖 발자국 소리까지 듣는 게 바로 무림인이 아닌가. 혹시 출타 중이신가. 천개는 그저 형식적으로 걸어놓은 빗장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마루 장지문을 열자 괴괴한 정적만이 실내에 고여 있었다. 천개는 왠지 모를 섬뜩함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실 문 앞에서 다시 한번 기척을 냈다.

"대인 어른, 저 천개입니다. 아직 주무시는지요?"

천개는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문안을 건넨 것일 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내실 문을 열었다. 침대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대인이 없었다. 장기 출타를 할 경우가 없진 않으나 그때는 항상 비영문 집사인 자기한테 행적을 알려놓고 간다. 새벽 산책이라도 갔을까, 하고 침대를 살펴보니 이불이 침대와 바닥에 반쯤 걸쳐진 채 나뒹굴고 있다. 적어도 그가 아는 일운상인이라면 이불을 저런 식으로 아무렇게나 펼쳐놓고 나가진 않을 것이다.

망연히 서 있는 천개의 귀에 가느다란 신음이 들려왔다. 어디지? 쫑긋하고 귀울이다 북쪽 벽에 나 있는 자그마한 욕실 문이 보였다. 욕실 문을 열자 욕조통 안에 잠긴 일운상인이 보였다. 일운상인은 욕조 난간에 목을 받치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내고 있다. 천개는 한 걸음에 다가가 일운상인을 욕조에서 건져냈다.

"대인, 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천개의 품에 안긴 일운상인은 끊어질 듯 가녀린 목소리로 천개에게 말을 했다.

"조, 운"
"네?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대인 어른!"
"과, 관조운을 부, 불러… 주게."

천개는 관조운이 누구던가를 생각해보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싶어 일운상인을 안고는 급히 침실로 갔다. 천개가 내딛는 발자국마다 핏자국이 붉은 꽃잎처럼 수를 놓으며 점점이 이어졌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주3회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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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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