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연대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투쟁하고 집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접 나서기 힘든 일반시민에게도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길을 터준 셈이죠. 그게 사회운동과 일반시민을 연결시키는 작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요?"지난 1년을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가능성'으로 답했다. 13일 오후 만난 김은주
진보마켓 대표 이야기다. 그녀의 말처럼 진보마켓은 지난 1년 동안 "다양한 연대의 가능성"을 시험하며, "사회운동과 일반시민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다.
지난해 1월 7일 문을 연 진보마켓은 인터넷 쇼핑몰이다. 여느 인터넷 쇼핑몰과 다른 점은 수익금이 장기투쟁 사업장, 사회운동 현장과 '연대'하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 운영비를 제외한 수익금 전액은 해고노동자 자녀 장학금 지원 등에 사용된다.
현재 직원은 두 명이다. 두 명으로도 진보마켓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생산자 직거래 체제이기 때문이다. 진보마켓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만 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거래한다.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운영비를 아껴야 지원을 많이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진보마켓은 지난 1년 동안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현대자동차 비정규지회, 공공운수연맹 택시전북지부 등을 지원했다. '연대'는 달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업장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1월 연대 사업장은 올해 벽두에 회사의 '야반도주' 소식이 알려진 기륭전자 노조다.
"환불금은 안 주셔도 돼요, 좋은 데 쓰세요"김 대표는 1년 동안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으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지원했던 때를 꼽았다.
"처음으로 지원했던 곳이 쌍용자동차였어요. 그때 해고노동자 자녀분께 장학금을 드렸는데, 정말 좋아하셨어요. 아르바이트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없었는데 한 학기는 고생 안 하고 공부할 수 있겠다고. 얼마 전에는 밀양 할머니들께 수면양말과 장갑을 보내드렸는데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 시골분들이라 수면양말이 뭔지도 모르셨는데 따뜻하다고 좋아하셔서 보낸 저희도 정말 좋았어요."김 대표는 "진보마켓의 취지에 공감하는 고객들의 호응도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물건을 구입한 후 구입 취소를 했는데 환불해드리려고 하니 그냥 투쟁사업장에 쓰라고 하시는 분도 있고, 원래 상품보다 더 많은 돈을 보내주시는 분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진보마켓에서 상품을 구입한 사람들에게는 소식지를 보낸다. 본인이 상품을 구입해서 생긴 수익으로 어느 투쟁 현장을 지원했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리기 위해서다. 페이스북으로도 진보마켓의 활동을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진보마켓이 주로 다루는 품목은 친환경농산물과 친환경세제, 생활용품 등이다. 김 대표는 "친환경농산물에 대한 신뢰가 형성돼 있어서 많이 팔린다"며 "특히 쌀과 과일은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다"고 자부했다. "친환경세제도 일반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품질도 좋다"는 '깨알 홍보'를 늘어놓았다.
그렇다고 진보마켓의 지난 1년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자본금이 부족해 대형 쇼핑몰의 가격 경쟁력을 당할 수 없고, 광고를 통해 홍보하기도 어렵다. 수익은 안 나도 장기투쟁 사업장 지원을 끊을 수는 없으니 운영비가 부족한 실정이다. 김 대표는 "매출이 적어 지원하는 금액이나 대상이 협소한 것이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보도자료도 내고, 취재 요청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언론을 통해 홍보할 계획이다. 새로운 상품도 준비 중이다. 월 만 원을 납입해 장례, 여행, 결혼 등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는 일종의 상조 상품이다. 김 대표는 "비정규직이나 중소영세 사업장은 회사 복지가 거의 없어, 적은 돈으로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상품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물론 일반시민도 가입할 수 있다. 김 대표는 "가격도 저렴하고, 가입 당시 금액이 인상되지도 않는 게 장점"이라며 끝까지 '홍보'를 잊지 않았다.
"그분이 돌아가신 지 1년 좀 넘었다"
김 대표가 진보마켓을 만들어 장기투쟁 사업장을 지원하는 것은 해고노동자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녀 자신이 해고노동자이기도 하다. 김 대표는 20년 넘게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세 번의 해고를 당했다. 모두 부당해고로 판결나 복직하긴 했지만, 오랫동안 해고노동자로 살아야 했다. 함께 해고된 동료들의 고통도 지켜봐야만 했다.
"해고자들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보여도 사실은 다들 힘들게 살아요. 투쟁기금이 있어도 그걸 개인적으로 쓸 수는 없으니까 굉장히 궁핍해요. 그런데 혼자만 해고된 게 아니니까 힘든 걸 표현할 수도 없고, 그러다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내면은 다들 너무 힘든 거죠. 그런 분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이호일 지부장이 잘못된 것도 있었고…."고(故) 이호일 전국대학노조 한국외대지부장은 2006년 불법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이후 2009년 해고무효소송에서 승소하면서 복직했지만 해고 기간 쌓인 빚을 해결하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는 2012년 12월 25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호일 지부장을 회상하던 김 대표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굉장히 가까운 동료였어요. 파업하면서 같이 고생하고, 같이 해고당했고. 아주 강직해서 상사에게는 바른 말 잘 하지만, 청소하시거나 경비 서시는 분들에게는 굉장히 예의 있는 분이었지요. 그런데 해고된 후에 힘들어하다 안 좋은 일까지…. 결국은 부당한 해고가 그분을 돌아가시게 한 거죠.""그분이 돌아가신 지 1년 좀 넘었다"고 말하는 김 대표의 눈은 쓸쓸해보였다. 진보마켓이 탄생한 것은 바로 그 쓸쓸함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 이호일 지부장과 해고노동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그냥 넘겨버릴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해고노동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이제까지 진보마켓의 '연대'가 주로 해고노동자나 노동현장에 이뤄졌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연대의 폭과 범위를 넓히려 한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시민단체나 진보단체 활동가, 역시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부터 줄곧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진보언론과도 '연대'할 생각이다.
"소비 패턴 조금만 바꿔도 연대할 수 있어요"그래서 지금의 매출 부진이 더 아쉽다. 더 많은 '연대'를 위해서는 매출이 지금보다 늘어야 한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진보마켓을 많이 이용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소비 패턴을 바꾸기가 쉽지 않아요. 가던 곳에 가서 사게 되고, 익숙한 상품을 구입하게 되고. 하지만 똑같은 상품을 구입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해고노동자나 현장을 지원할 수 있으니 조금 불편하고 낯설어도 진보마켓을 많이 이용해주셨으면 해요. 소비 패턴이 약간만 바뀌어도 많은 어려운 분들과 연대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