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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명함입니다."

민주당 청년위원 유방(28)씨. 그는 지난 9월 새로운 명함을 제작했다. 기존에 사용해왔던 초록 바탕 명함은 중앙당에서 결정한 당의 상징색과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아깝지만 수백 장의 명함을 서랍 속에 넣어둬야 했다.

유씨만이 아니다. 새누리당·정의당 관계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누리당 당직자 서아무개(29)씨도 기존의 파란 바탕 명함을 빨간색으로 바꿨다. 그는 "빨간 새누리당, 처음 바꿨을 때 정말 (보수정당이 맞는지) 어색했다"고 회상했다.

정의당도 지난 14일 기존 색을 버리고 노란색을 당의 새로운 색깔로 정했다. 당직자들은 분주하게 "새로운 명함을 찍어야 한다"며 인쇄소에 전화를 걸었다.

빨간 새누리당과 파란 민주당

 누가 진짜 보수? 황우여 대표와 빨간 새누리당
누가 진짜 보수? 황우여 대표와 빨간 새누리당 ⓒ 남소연

'대한민국 정치 1번지' 여의도에 때 아닌 '색깔정치' 바람이 불고 있다.

전통적으로 '진보는 빨강, 보수는 파랑'이라는 이미지가 고정돼 있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과 신한국당이 보수의 대변인을 자처하며 파란색을 자신들의 색깔로 사용한 이유기도 하다. 1981년 민주정의당 시절부터 2012년 2월 새누리당까지, 파란색은 32년 간 대한민국 보수의 색깔로 사용돼 왔다.

하지만 이러한 '고정된 이미지'는 지난 대선을 앞두고 전면 개편됐다. 각 정당들은 기존의 고정적인 이미지를 벗고 새로운 이미지 변화를 노렸기 때문이다.

첫 움직임은 새누리당에서 시작됐다. 새누리당은 2012년 2월 대선을 약 10개월 두고 전격적으로 당색과 로고를 교체했다. 의도는 분명했다. 민심과 대권을 잡기 위한 '충격요법'이었다. 더불어 진보가 강조한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을 재빨리 전면에 내세웠다. 보수를 넘어 중도파와 청년층까지 끌어안겠다는 심산이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새누리당의 변신은 성공했다. 보수정권 10년이 유지됐다. 특히 새누리당의 강경 보수 이미지에 거리를 뒀던 중도 성향의 유권자까지 끌어안았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대권을 잡은 후 경제민주화 법안, 4대중증질환 전액보장, 반값등록금,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등 주요 공약들을 줄줄이 축소·후퇴시켰다.

 누가 진짜 개혁 세력? 김한길 대표와 파란 민주당
누가 진짜 개혁 세력? 김한길 대표와 파란 민주당 ⓒ 남소연

민주당도 자신의 색을 30년 가까이 유지했다. 1987년 평화민주당을 시작으로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민주통합당은 녹색과 노랑을 상징색으로 여겨왔다. 그러던 민주당도 지난해 9월 당색을 노란색에서 파란색으로 전격 교체했다. 파란색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수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영국 보수당의 당색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에 일부 지지자들은 민주당의 보수적 색체가 더 강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새누리당이 당색을 빨간색으로 바꿔 새로운 지지자들을 확보했듯이 이를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이었다. '보수'와 '안정'으로 인식되는 파란색을 당 상징색으로 차용함으로써 보수와 중도층을 흡수하려는 의도를 보였던 것이다.

민주당의 경우 변화와 외연 확장을 통해 폭넓은 국민의 공감대를 얻겠다는 애초 의도는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의 지지율은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신년 기자회견 역시 현재의 낮은 지지율을 반전시킬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란색은 이제 '노무현 색깔' 아니다?

통합진보당과 정의당 로고 보라색 통합진보당과 노란색 정의당
통합진보당과 정의당 로고보라색 통합진보당과 노란색 정의당 ⓒ 각 정당 홈페이지 갈무리

통합진보당은 지난 2011년 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새진보통합연대가 통합해 창당한 정당이다. 통합 전 민주노동당의 당색은 밝은 주황색이었고, 국민참여당은 노란색이었지만 창당 이후 통합진보당은 보라색 물결무늬의 로고를 사용하고 있다. 이수정 통합진보당 부대변인은 "파란색과 빨간색의 혼색으로 보라색을 사용하고 있다"며 "보라색은 하늘(파란)과 인간(빨간)에 내포된 평등과 인권의 색"임을 강조했다.

정의당은 분홍색과 초록색 잎사귀 모양을 정당 이미지로 사용해왔다. 일반적으로 분홍은 여성을, 초록색은 자연을 상징한다. 이 색깔을 통해 정의당은 여성과 아이,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와 자연을 함께 챙기겠다는 취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당색 교체가 이어지자 정의당도 지난 14일 새로운 통합이미지를 발표했다. 상징색은 노란색이었다. 천호선 정의당 대표는 통합이미지를 발표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노란색은 우리가 지향하는 따뜻한 복지국가를 가장 잘 표현하는 색"이라며 채택 배경을 설명했다. 이번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따뜻한 복지국가를 선도할 수 있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노란색은 이미 한국 정치사에서 여러 정당들에 의해 '개혁'의 이미지로 많이 사용돼 왔다. 새정치국민회의(1995년)과 열린우리당(2003년), 국민참여당(2010년), 민주통합당(2011년) 등이 당 상징색으로 '노란색'을 사용한 것이다.

특히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노사모'가 등장, 노란 풍선, 노란스카프, 노란 희망돼지저금통이 등장했다. 노란색을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되는 까닭이다. 이러한 우려를 정의당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14일 정의당이 새로운 통합이미지(PI)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노란색'을 채택했던 배경에 대해 설명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안철수의 새정치추진위원회 경우 아직 창당 전이기에, 공식적인 당색깔은 결정되지 않았다. 다만 슬로건과 누리집에서 하늘색을 임시로 사용하고 있다. 내부적으로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해 채택했다'는 말도 있지만 "아직 당색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유럽에서 보수는 파랑! 진보는 빨강!

해외의 정당들도 우리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만 봐도 공화당과 민주당은 각각 빨간색과 파란색을 자신들의 대표색으로 내세우고 있다. '좌는 빨강, 우는 파랑'이라는 전통적인 색 배치와는 차이를 보인다. 미국 역시 중도층을 좀 더 끌어안겠다는 전략에서 자신들의 정치색과는 다른 색을 선택한 것이다.

일본의 경우도 우리와 비슷하다. 생태주의와 환경을 상징하는 '녹색'을 보수정당이 사용하고 있다.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속한 자유민주당(자민당)이다. '환경'과 '평화'라는 진보적 가치에 뿌리를 둔 녹색당의 상징색을 자민당의 보수적 이념과 무관하게 내걸었다. 일본의 제1야당이자 중도노선을 표방하는 민주당 역시 빨간색을 당색으로 사용하고 있다. 민주당 대부분의 의원들이 중도노선을 표방하고 있어 '좌파'를 상징하는 보편적인 빨간색 이미지와 맞지 않다.

유럽 각국 정당들의 엠블럼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독일 사민당 / 독일 기민당 / 영국 보수당 / 독일 녹색당
유럽 각국 정당들의 엠블럼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독일 사민당 / 독일 기민당 / 영국 보수당 / 독일 녹색당 ⓒ 각 정당 홈페이지 갈무리

하지만 대부분의 서구 유럽 정당의 경우 자신들의 신념과 가치를 정당색으로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 세계에 퍼져있는 녹색당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가치인 환경 중시와 친환경 에너지 확보, 핵발전 중단 등의 정책을 내세우며 '녹색'을 전면에 드러낸다. 누리집만 봐도 온통 녹색 천지다. 녹색이 자신들의 정체성과 색깔·정책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치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사회민주당(사민당)은 좌파의 상징인 빨간색을 처음부터 사용하고 있다. 2005년 독일 대선 후, 사민당과 녹색당이 공동수립한 정부를 '적녹연합'이라 부른 이유기도 하다. 반면, 앙켈라 메르켈 총리가 속한 보수정당인 기독교 민주당(기민당)은 검정과 주황을 당의 상징색으로 내걸었다. 검은색은 전통을 강조한 가톨릭 성직자들의 사제복 색깔에서 기인했다. 실제 기민당은 과거 가톨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일부 의원들이 검은색 사제복을 입은 성직자였다.

영국은 더 전통을 중시하고 있다. 거대 양당에 의해 운영되는 영국 의회는, 보수당이 파란색을 노동당이 빨간색을 당색으로 사용하고 있다. 노동당의 경우 노동자의 투쟁을 의미하는 빨강을 채택함으로써 노동자 정당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복지국가로 대표되는 북유럽 국가들도 전통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사회민주당(사민당)은 사회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건 만큼 독일의 사민당과 같이 '빨강'을 당색으로 사용한다. 독일의 적녹연립정부처럼 스웨덴도 사민당과 녹색당이 적녹연합을 구성해 야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여당이자 지금의 스웨덴 총리 프레드리크 레인펠트를 배출한 보수당의 당색은 전형적인 파란색이다.

핀란드의 정당들도 스웨덴의 정당들과 유사하다.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중도 좌익정당인 사민당도 역시 빨간색을, 보수를 표방하는 국민연합당은 파란색을 차용했다. 반면 농민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출범해 지금은 중도세력으로 지지범위를 확대한 중도당의 경우 녹색을 당색으로 쓰고 있다. 노르웨이의 경우에도 사회주의좌파당은 적색, 보수당은 파란색을 상징색으로 사용하고 있다.

"쉬운 이미지 교체, '콘텐츠' 없으면 소용없다"

김태일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러한 '색깔정치'를 "과거에 우파는 파랑, 좌파는 빨강, 파시스트는 검정, 생태주의는 녹색이라는 고정된 표상이 있었지만, 최근엔 새로운 지지자들을 흡수하기 위해 전통적인 이미지가 유효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뒤이어 김 교수는 "중요한 것은 본질"이라며 "정당의 색깔과 이미지는 그에 맞는 콘텐츠와 결합하지 않으면 그 효과가 미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건국대에서 정치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조배준씨도 한국 정당의 색깔 변경을 보며 "'간판 교체'와 다를 바 없다"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알맹이(정책)보다 껍데기(당색깔)를 중시하다 보니 선거를 이기기 위해 '당색깔이 곧 정당 정체성'이라는 기본 공식조차 지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특히 "대선 이후, 새누리당의 색깔 변화가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경험한 유권자들에게 색깔 교체는 진부한 정치전술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덧붙이는 글 | 구소라·김종훈 기자는 오마이뉴스 19기 인턴기자입니다.



#정당색깔 교체# 정의당# 새누리당#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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