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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잉연결시대 표지
과잉연결시대 표지 ⓒ 수이북스
'연결의 과잉, 관계의 결핍'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는 지금 우리 사회를 이렇게 정의했다.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현상들을 봤을 때 이 정의는 우리 사회를 날카롭게 꿰뚫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이웃들은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고, 시신은 며칠째 방치돼 세간에 큰 충격을 안겼다.

또한 '노모포비아'란 증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노모포비아란 노 모바일 포비아의 줄임말로 휴대전화를 소지하지 않았을 때 느끼는 공포를 뜻한다. 이는 관계의 결핍으로 생긴 공포증이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많아졌다고 말하는 현 시대에서 이런 현상들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일견 의아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이 소통의 수단이라고 말하고 있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트위터, 페이스북 등은 사람들을 광범위하면서도 과도하게 연결한다.이는 관계의 확장보다 오히려 결핍을 야기한다.

사람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도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의 글을 보고 글을 올린 사람을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 상대방과 관계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을 가지도록 만든다. 즉, 과도한 연결은 관계의 결핍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기현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정한 관계의 회복을 꾀하려면 먼저 과도한 연결 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스마트폰, 인터넷이 보여주는 세상은 실재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미지와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블로그와 페이스북, 트위터에 올린 글로는 결코 상대방을 알 수 없다. 상대방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가 만든 이미지와 환상일 뿐이다. 관계의 회복을 위해선 먼저 이미지와 환상으로 구축된 자신만의 세계에서 탈피해야 하는 것이다.

<로그아웃에 도전한 우리의 겨울>의 저자 수잔 모샤트의 시도는 이미지와 환상의 세계를 탈피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수잔은 가족과 함께 6개월이란 시간동안 전자제품에서 '로그아웃'하는 실험을 감행한다. 반년이란 시간동안 인터넷과 아이팟 등으로 단절돼있던 가족의 관계는 회복됐고, 가상세계에 빠져있던 아이들은 직접 관계하는 법을 터득했다.

이런 고무적인 결과는 이미지와 환상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려주고 있다. 자신이 만들었던 세계에서 벗어났다면 '나'와 '상대방'의 차이를 인정하는 다음 수순을 밟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점점 모든 것이 획일화되는 사회다. 이런 풍토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을 것이라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이는 역시 다른 사람과 관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논어>의 '자로편'에 보면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이란 말이 있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이를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고 해석한다. 공자의 말처럼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할 때, 군자가 되며 관계 또한 일어날 수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이 동일하다면 굳이 관계할 필요가 없다. 자본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서 공자의 말은 관계의 회복이라는 논의에 큰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제 관계의 회복을 위해 만남과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 탁월한 연결 수단 덕분에 사람들은 이웃에 사는 이들과 만나거나 접촉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본의 사례와 같은 충격적인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만남과 접촉은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인사'를 하는 것이다. 이웃과 관계하려면 먼저 이웃을 인식해야 한다. 이웃에게 '나는 당신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인사다. 수없이 스쳐가는 사람들 속에서 상대방을 인식하고 있다는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관계도 형성할 수 없다. 즉, 인사는 가장 손쉬우면서도 중요한 관계 회복의 시작이자 수단이 될 수 있다.

또한 관계를 시작했다면 단단히 다져야 한다. 몇 번 인사했다고 해서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지속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이런 지속적인 만남 속에서 서로 인식을 넘어서 대화를 해야 한다. 이어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깊은 '앎'이 있어야 한다. 앎에 이르면 관계는 자연히 회복될 것이다.

법정스님은 <오두막 편지>에서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과잉 연결 상태 속에서의 만남은 한때의 마주침일 뿐이다. 진정한 관계를 위해서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타자를 인식하고, 나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부단히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리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법정스님의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관계의 결핍의 원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본 기자의 블로그 http://picturewriter.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과잉 연결 시대 - 일상이 된 인터넷, 그 이면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윌리엄 H. 데이비도우 지음, 김동규 옮김, 수이북스(2011)


#과잉연결시대#무연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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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읽고 짬짬이 쓰는 김 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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