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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살수 무영객은 강호의 전설적인 비급 무극진경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은거한 고수 모충연을 암습한다. 모충연은 일격을 당한 후 제자 관조운에게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남긴 채 운명한다. 한편 황실의 비밀조직 은화사 역시 무극진경의 강호 출현을 눈치 채고는 관조운을 추격한다. 관조운은 살수와 은화사에게 이중으로 쫓기면서 스승 모충연이 가르쳐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 필자말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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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장(關家莊), 현판이 내걸린 솟을대문을 지나 안채 앞에 서자 조운은 한쪽 무릎을 접어 눈높이를 맞춘 후 섭월에게 말했다.

"섭월아, 오늘 저자에서 본 구경거리는 마음에 담지 말고 흘려버리도록 하거라. 너는 선비의 그릇이니 그 안에 경학을 담아야할 것이다. 어머니의 뜻이 간구하시니 부디 문사의 길에 매진토록 하거라."

조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숙부님, 담에도 꼭 저랑 같이 가요."

조운의 당부에도 아랑곳없이 섭월은 저자의 구경이 내내 가슴에 또아리 튼 모양이었다.

"월아, 숙부님의 노고에 감사드려야지."

조운의 등 뒤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운이 돌아보니 붉은 치마에 적삼을 입은 여인이 조용히 서 있다. 이월의 동백처럼 겹겹이 싸인 기품이 단단하게 뭉쳐져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안채 출입문에서 숙질(叔姪)이 오기를 기다린 모양이다. 여인이 버들잎 같은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아이를 쳐다보자, 아이가 이내 손을 배꼽에 맞잡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드린다.

"숙부님의 노고 덕분에 소질(小姪), 안목을 넓혔습니다."

아이의 그런 말투가 조운에게는 썩 내키지가 않았다.

"월아, 그건 또 웬 거냐?"

여인의 끊어지듯 또박한 말투에 섭월이 흠칫하다가 새총을 조운에게 내민다.

"숙부님, 소질에겐 이것이 소용없사옵니다. 숙부님께서 도로 거두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조운은 새총을 받아들고 진진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진진의 눈 속엔 망망대해보다도 더한 아득함이 서려 있다. 저 아득함에 내가 언제 파문을 일으켰던가. 조운은 아스라한 기억 속을 헤집었다.

조운과 진진은 남녀의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동접 친구였다. 조운의 부친과 진진의 부친은 막역지우 사이여서 양가가 스스럼없이 드나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가(儒家)의 내외 법도를 엄하게 따르지 않는 양가의 가풍도 한몫을 했다. 조운이 다섯 살 때 시작한 천자문 독송을 옆에서 지켜보던 진진이 자기도 동무처럼 하겠다고 조르자, 곁에서 지켜보던 관가, 필가, 두 친구는 따로 독선생을 모실 것 없이 같이 공부시키자고 했다.

일곱 살 때부터 책상에 나란히 앉은 둘은 무람없이 지내다가 꽃 피는 춘삼월 강남 갔던 제비 돌아오듯, 북행 갔던 기러기 돌아오듯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의 가슴에 연정이 싹 트기 시작했다. 춘삼월보다 더 춘삼월 같은 열여섯 살 때였다.

그러나 둘 사이의 연정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양가의 부모는 관가의 큰 아들 조영과 필가의 장녀 진진 사이에 덜컥 백년가약을 맺어버렸다. 그들이 한 잔 술에 의기투합을 한 적이 한 두 번이었겠냐 만은 이번만큼은 제법 격식을 갖추어 공표를 하고마니 조운과 진진은 서로의 속마음을 밝힐 계제도 없이 분위기에 눌리고 말았다. 낙담한 조운은 문의 전통을 버리고 무를 따르겠다고 부친에게 고했다. 부친은 문관은 네 형이 있으니 집안에 무관 하나쯤 있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하여 쾌히 승낙하였다.

관조운이 무의 세계 입문할 당시엔 그저 길어야 삼년, 전직 표두 출신을 독선생 삼아 무관이 되기 위한 자질만 함양하고 제자리로 올 줄 알았으나, 열여덟이 되는 해엔 본격적으로 비영문의 산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바야흐로 강호 협객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바로 그 시점에 진진과 조운의 가형 조영은 혼례를 올렸다.

"월이 너무 속된 것에 빠질까 염려되옵니다. 도련님."

진진이 조운을 향해 조곤하게 말을 건넸다. 섭월이 저잣거리의 소란스러움에 지나치게 빠지게 하지 말란 부탁이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그 점 유의하겠습니다. 형수님. 그럼."

이 시점에서 형수와 논쟁을 하고 싶지 않은 조운였다. 그가 돌아서려는데.

"도련님, 비영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모 대인이 위독하시답니다."
"네에? 스승님이?"

조운이 비영문을 떠난지 육년이 지났지만 그건 형식적인 적(籍)을 떠났을 뿐이었다. 출문 후에도 그는 간간이 스승 모충연의 저택에 찾아가 유학의 경전을 논강하고 설파했다. 관조운이 무에서는 제자였지만 문에서는 오히려 사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어찌 한낱 경전의 자구와 구절에 앞섰다고 스승이 되겠는가. 시(詩), 서(書), 화(畵)의 능란함은 조운의 기예가 앞섰지만, 문(文), 사(史), 철(哲)의 이치를 깨우치는 건 배움이 늦은 늙은학동이 오히려 깊었다. 이를 보고 조운은 무(武)에도 깨달음의 길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간에는 무예가 깊어 무도(武道)가 되는 것이고, 궁극의 길에서는 모두가 통한다는 역(易)의 원리는 천지를 관통하는구나 싶었다. 스승 모충연은 사서삼경 중 특히 중용(中庸)의 묘(妙)에 철리(哲理)가 깊었다. 중용의 도에서 벗어난 검과 마음은 위험하기가 매한가지구나! 어느 날 벽에 걸린 장도를 달빛에 기울이며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이었다. 그 이후 벽에는 아무 것도 걸려있지 않았다.

"혹시 어떤 연유로 위독하시다는 내막은 모르십니까?"
"저도 모릅니다. 비영문의 연 장문인께서 사람을 보내 도련님께 비보만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진진이 대답했다.

"그밖에 다른 말은……."

황망 중이라 조운은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전인(傳人)은 애초에 도련님이 계신 저택에 들렀다가 안 계셔서 이곳으로 왔답니다. 그리고 모 대인께서 도련님을 찾고 계신다는 전갈만 전해 주고는 급히 가셨습니다."

"그럼 어디로?"
"모 대인께서는 의원의 치료를 받으며 비영문에 계시답니다."

비보를 들은 관조운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형수 진진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말을 한 필 빌려 비영문의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주3회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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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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