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모처럼 쨍한 하늘을 보여준다. 화순 이양에 있는 쌍봉사로 향한다. 국도 29호선을 벗어나 쌍봉사로 가는 길은 정겨운 풍경을 보여준다. 산자락 밑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들도 보이고, 산골이지만 자급자족할 만한 논밭을 가지고 있어 여유 있어 보인다. 저수지 공사가 한창인 곳을 지나면 사동(절골)이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예전부터 이곳은 절로 유명했었나 보다.
쌍봉사는 도로를 구불구불 따라가다 길옆으로 갑자기 마주친다. 보통 절집들이 일주문을 지나 숲길을 한참 올라가야 하는 것과 다른 분위기다. 평지에 절집이 있는 풍경. 그러고 보니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나 보림사에서도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주차장이 일주문 안에 있다. 예전에는 일주문이 없었는데 새로 세운 것 같다. 보통 일주문 현판에는 산이름과 절이름을 쓴다. 그런데 쌍봉사 일주문에는 쌍봉사자문(雙峰獅子門)이라고 써 놓았다. 사자산문의 기초를 닦은 절집임을 알리기 위해서 인 것 같다.
쌍봉사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동리산 태안사에 있는 적인(寂忍)선사 혜철(慧徹)의 부도비에는 스님이 신무왕 원년(839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쌍봉사에서 처음으로 하안거(夏安居)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문성왕 17년(855년) 경 철감(澈鑒)선사가 이곳에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으며, 이후 제자 징효(澄曉)선사는 강원도 영월 흥녕사에서 사자산문을 개창하게 되므로, 쌍봉사는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틀을 잡은 곳이 된다.
쌍봉사는 정유재란 때 대부분 불타서 인조 6년(1628년)에 대웅전을 비롯하여 절집들을 중수하였는데, 한국전쟁 때 대웅전과 극락전만을 남긴 채 대부분의 소실되었다.
주차장 옆에는 연못이 있다. 고려시대의 문인 김극기(金克己)가 쌍봉사에 들렀다가 삼청각을 예찬한 시가 쓰여 있다. 삼청각이 있던 자리는 연못이 되었다. 연못은 추위에 살짝 얼었다. 돌거북이가 물에 닿지 않으려고 발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게 보인다.
천왕문을 지나면 3층 목탑이 웅장하게 섰다. 가운데로 난 길 양 옆으로는 예전에 전각이 있었음직한 넓은 터가 있다. 몇 백 년은 살았을 나무들이 몇 그루만 그 터를 지키고 있다. 목탑 2층에는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특이한 절집구조를 가졌다.
대웅전 내부는 몇 사람 앉을 정도로 좁다. 스님 혼자 들어가 있으면 딱 맞을 구조다. 큰 부처님을 모시는 것보다 높은 지붕을 가진 대웅전을 만들었던 발상이 이채롭다. 안타깝게도 지금 보고 있는 대웅전은 1984년 4월초에 촛불로 인한 불타버린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불타기 전 목탑은 인조 때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 3층 목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다. 대웅전 안에는 화마를 피한 부처님과 보상상이 그대로 남아있다, 옛 목탑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다.
나무로 만든 지장전 조각들대웅전 뒤로 앙증맞은 계단을 올라서면 극락전이 커다란 현판을 무겁게 달고 있다. 극락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양편으로는 단풍나무 두 그루가 문처럼 서 있다. 예전 화마 때 이 단풍나무가 불길을 막고 극락전을 보호했단다. 단풍나무는 한쪽 면이 심하게 손상된 채로 서있다.
극락전 오른쪽에는 나한전이 있고 왼편으로는 지장전이 있다. 완벽한 극락세계를 연출한 구조다. 건물들은 규모가 작다. 명성에 비해 크지 않은 절간들은 편안함을 준다. 지장전 안으로 들어서니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시왕상(十王像), 판관(判官), 귀왕(鬼王), 동자(童子), 사자(使者) 등 21구의 목조각상이 있다.
우락부락한 퉁방울눈을 부라리며 생동감 넘치는 모습과 고민하는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있는 조각상들을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통나무를 그대로 깎았다. 대부분 진흙으로 만드는데 비해 쌍봉사 지장전에 모신 조각상들은 나무로 만들었다는 게 특이하다.
이 조각상들은 현종 8년(1667년)에 조성된 것으로, 구부러진 손 등은 섬세하게 조각을 하였고, 얼굴마다 시선처리와 표정들이 제각각 살아있다. 단장한 의복에 그려 놓은 사자, 용, 거북, 꽃 등 정교한 그림은 볼수록 탄성을 자아낸다.
절집 뒤로 돌아가면 승탑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대숲을 옆에 끼고 돌아서 올라간다. 정겨운 길이다. 예전 동네 골목을 돌아가는 느낌이다. 댓잎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선다.
승탑이 있는 곳은 담장으로 두르고, 늙은 감나무가 지키고 있다. 절집의 느낌을 덜어버린 승탑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승탑의 공간으로 들어선 순간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완벽한 조형미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
국보 제57호로 지정된 철감선사탑(澈鑒禪師塔)은 8각 원당형(圓堂型) 구조로 조형미가 뛰어나고 장중한 모습은 신라시대 최고의 석공예술을 보여준다. 비교 불가. 기단석에는 용과 함께 운룡문이 꿈틀거리면서 피어나고, 각 면마다 새긴 사자는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반은 인간이고 반은 새인 가릉빈가는 각 면마다 각기 다른 악기를 연주하면서 날개 짓을 한다. 몸돌에는 문비라는 자물통을 정교하게 만들어 달았고, 사천왕상과 비천상이 호위하고 있다.
승탑의 최고 절정은 옥개석이다. 기왓골을 타고 내려오는 선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기왓골 끝에는 동전만한 막새를 만들었고 그 안에는 8잎 꽃잎이 피어있는 연꽃을 새겨 넣었다. 찬찬히 보고 있으면 연꽃이 실제 피어있는 것 같은 환상에 빠져 든다.
보물 제163호로 지정된 철감선사비는 아쉽게도 비석은 없다. 앉은뱅이처럼 앉아있는 탑비. 그러나 비석을 잃어버린 거북이는 한쪽 앞발을 들고 있다. 선을 찾아 떠나는 구도의 길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잃어버린 비석이라도 모형으로라도 세워 놓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