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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란 훈장 한 조각을 위해 길고 힘든 싸움을 하는 존재다."

언뜻 듣기엔 남성의 단순함을 꼬집는 것 같은 이 말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한 말입니다. 사실 나폴레옹처럼 훈장의 효과를 잘 활용했던 지도자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황제가 된 그가 1802년 직접 제정했던 '레지옹 도뇌르'(Ordre national de la Légion d'honneur) 훈장은 오늘날까지도 프랑스를 대표하는 권위 있는 훈장으로 인정받고 있죠.

따지고 보면 훈장의 가치는 훈장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국가에 대한 희생과 헌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에 훈장의 가치도 빛나는 것이겠지요. 제가 뜬금없이 훈장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난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순직했던 고 김오랑 육군 중령 때문입니다.

정부는 지난 14일 정홍원 국무총리의 주재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김 중령에게 보국훈장을 추서하는 내용의 영예수여안을 심의·의결했습니다. 김 중령이 목숨을 잃은 지 35년만의 일입니다.

1979년 12월 13일 새벽 0시 20분, 서울 송파구 거여동의 육군 특수전사령부(특전사)에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해 반란군들이 들이닥쳤고, 정 사령관의 비서실장이던 김 중령(당시 소령)은 한 자루 권총을 빼들고 반란군과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이 총격전에서 김 중령은 여섯 발의 M-16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절명했습니다.

김 중령의 시신은 부대 뒤 야산에 가매장되었다가 육사 동기생들의 항의와 노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만, 군인으로서 그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군사반란의 주범들이 사법적 단죄를 받고, 12·12 쿠데타에 대한 역사적 평가까지 마무리되었지만 김 중령의 명예회복은 더디기만 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12.12쿠데타 과정에서 희생된 김오랑 중령, 정선엽 병장, 박윤관 상병에 대한 33기 추도식이 12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29번 묘역 깅오랑 중령 묘소에서 열리고 있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12.12쿠데타 과정에서 희생된 김오랑 중령, 정선엽 병장, 박윤관 상병에 대한 33기 추도식이 12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29번 묘역 깅오랑 중령 묘소에서 열리고 있다. ⓒ 권우성

김 중령에게 무공훈장을 추서해야한다는 요구는 그의 특전사 후배 김준철(예비역 육군 대위)가 주축이 된 '고 김오랑 중령 추모사업회'(참 군인 김오랑 기념사업회의 전신)이 주축이 되 지난 2006년부터 있어왔습니다. 김씨는 무공훈장 추서를 위해 국방부와 육군사관학교 앞에서 눈·비를 맞으며 일인시위를 벌였고, 국회 국방위원회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백방으로 뛰어다녔죠.

이런 노력에 힘입어 지난 17대와 18대 국회에서 김 중령에 대한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결의안이 각각 발의되었지만 국방부와 안전행정부의 비협조로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김 중령이 '전투 참가' 등 상훈법이 규정한 무공훈장의 수여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었죠. (사실 이번에 정부가 김 중령에게 추서하기로 한 훈장도 무공훈장이 아니라 보국훈장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국방부의 변명은 조금 궁색하게 들립니다. 5공화국 당시인 1980년 12월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 운동 유혈진압의 공로로 수 십 명의 반란군 인사들에게 이미 무공훈장이 수여되었거든요.

대표적인 인사들로 전두환 (태극 무공훈장), 노태우 (을지 무공훈장), 이학봉(충무 무공훈장), 허화평(충무 무공훈장), 허삼수 (충무 무공훈장), 장세동(을지 무공훈장)씨 등이 꼽힙니다. 물론 쿠데타를 통해 군권을 찬탈하고 광주의 시민들을 학살하고 나서 자기들끼리 나눠 가진 '셀프 훈장'이지만 말입니다.

 mbc뉴스 화면 갈무리
mbc뉴스 화면 갈무리 ⓒ mbc

그런데 법원은 이미 12·12쿠데타가 군사반란이었음을 확정하고 반란 수괴 및 동조세력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상훈법은 "훈장을 받은 자의 공적이 허위임이 판명된 때, 훈장을 받은 자가 국가안전에 관한 죄를 범하고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때, 훈장을 받은 자가 사형,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의 형을 받은 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죄를 범한 때에는 그 서훈을 취소할 수도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원 판결 이후에도 정부는 반란군에게 수여되었던 훈장을 회수하는 일에는 어떤 영문에서인지 소극적이었습니다. 지난 2006년 행정자치부는 12·12 쿠데타와 5·18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과 관련하여 훈장을 받았던 83명의 서훈을 취소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훈장을 자진반납한 사람은 고작 전두환, 장세동씨 2명뿐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분실 등의 이유를 대면서 훈장 반납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참 딱한 노릇입니다. 훈장의 진정한 명예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 전체가 인정하는데서 나오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훈장은 한낱 쇠붙이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996년 5월 18일, 당시 미국 해군 참모총장이었던 제레미 마이크 버다 제독이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는 17살에 나이를 속이고 해군 타자병으로 입대한 후 능력을 인정받아 대장까지 진급했던 입지전적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목숨을 끊은 이유는 훈장 위에 달린 조그만 'V'자 핀 때문이었습니다. 이 핀은 정식 훈장은 아니지만 실제 전투에 참여한 군인들에게만 훈장과 함께 이 핀을 달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집니다. 그는 참모총장직에 취임하기 얼마 전부터 베트남전 때 받은 2개의 훈장 위에 이 V핀을 꼽고 다녔는데, 바로 이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의 훈장 사유서에는 전투지역 근무는 인정했지만 그가 실제 전투에 참여했고 따라서 V핀을 수여받아야 한다는 구절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버다 제독은 자신에게 수여되지 않은 영예를 과시하고 다닌 셈이 된 것이죠. 마침 버다 제독이 자살한 날은 이 문제로 <뉴스위크>와의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던 날이었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그것을 달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나의 이 정직한 실수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버다 제독의 유서 일부)

비록 직접 전투는 하지 않았어도 임무수행 중 늘 적의 공격에 노출되는 위험에 처해있었고 전투준비를 하고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V핀을 달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버다 제독의 해명입니다. 그는 또 자신을 믿고 따라준 해군의 모든 장병들에게 수치심을 주어 미안하다는 사죄의 글을 남겼습니다. PX에서 1달러만 주면 누구든 구입할 수 있는 조그만 V핀, 하지만 그것이 지닌 무게는 한 군인이 목숨을 끊을 정도로 무거웠던 셈입니다.

버다 제독의 비극적인 죽음을 보면서, 당초 수여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주어졌던 훈장을 철저히 회수하는 일이야말로 주인 잘못 만났던 무공훈장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군사반란 세력들로 인해 상처받고 왜곡되었던 우리 역사를 바로 세워나가는 일이 아닐까요. 저도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겠습니다.


#김오랑#무공훈장#버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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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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