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부터 시작된 귤 수확전쟁이 끝이 났다. 귤 수확 전에 거리를 수놓던 황금물결이 이젠 자취를 감추고 없다. 귤이 사라진 제주의 풍경이란 참으로 쓸쓸하다. 지난 가을이래로 지겹도록 귤을 따고 만졌건만, 다시 오래된 귤나무가 있는 애월읍 상가리로 차를 몰았다.
현재 제주섬에서 재배되는 귤은 대부분 일본에서 도입된 품종들이다. 그런데 일본 야사에는 귤이 삼한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전한다. 오래전 한반도에서 귤을 도입한 일본인들은 근대에 서양인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서양 오렌지를 도입했고, 이를 재래종 귤과 접목하여 수많은 신품종을 만들어낸 것이다. 귤의 현대화에 성공한 일본인들은 조상들이 귤을 도입했던 한국에 신품종 나무를 전해주고, 일부는 로열티까지 챙기게 되었다.
세계에서 감귤을 최초로 재배한 것은 중국인들이다. 기원전 4세기경 중국에서 발간된 <화식전(貨殖傳)>에는 '촉한강 땅에 귤 1천 그루를 심은 농가는 천호의 제후왕과 같다'는 기록이 전한다. 당시부터 귤은 주인에게 부를 안겨다주는 효자식물이었음을 알려준다.
기록에 따르면 제주에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귤이 재배되고 있었다. 그런데 귤 재배가 시작된 시점과 도내 자생귤의 존재 여부는 오래도록 의문점으로 남아있었다.
언제부터 제주에서 귤이 재배되었을까귤의 재배가 도내 자생종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연평균 기온이 15℃ 이내이고, 겨울철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날 수가 적은 제주도의 온화한 기후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반면, 외래종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은 탐라국이 외래문명과의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문명을 유지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런데 최근에 제주도 농업기술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과거 제주에서 재배되던 귤 가운데, 사두감·감자·지각·병귤·편귤·진귤·동정귤 등은 모두 제주도 자생종인 것으로 드러났다. 탐라국 초기부터 제주에서는 귤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귤이 지금은 제주도 주민 상당수를 먹여 살리는 효자 작물이지만, 조선시대는 주민들의 고혈을 짜내는 애물단지였다. 고려 이전에는 탐라가 이웃나라에 바치는 조공품으로, 조선시대에는 조정에 바치는 진상품으로 각광을 받았다. 관리들은 조공이나 진상을 위해 과원을 설치하고 군인들로 하여금 이를 관리하게 하였지만,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민간의 것을 착취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상가리에는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귤나무가 자라고 있다. 고내봉 인근에서 지나는 어르신께 길을 물으니, 나무가 있는 곳을 친절히 알려주셨다. 어르신은 "나무가 너무 늙어 열매는 잘 맺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했다.
귤나무는 소박한 농가의 텃밭에 자라고 있다. 집의 안주인(박영옥씨)께 앙해를 구하고 집의 마당으로 들어섰는데, 오래된 나무 세 그루가 텃밭을 가득 매우고 있다.
애물단지 귤, 대를 이어 지켜온 사람들지금 제주의 농가에서 재배되는 조생온주 귤나무는 수령 50년이 넘기 시각하면 뿌리 부분에서 썩기 시작하는데, 상가리 귤나무들은 뿌리와 밑동이 여전히 든든하다. 자생귤의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귤나무 옆에는 20년 전 당시 북제주군수가 이들을 보호수로 지정했다는 표지판이 있다. 거기엔 품종은 진귤로, 수령은 당시 350년 정도라고 적혀있다. 귤의 소유자가 상가리 강성문님으로 되어 있는데, 안주인 박영옥씨는 "시아버지(강성문님)는 작년에 94세 일기로 돌아가셨고, 지금은 남편(강성요씨)과 더불어 시어머니를 모시고 이 집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놀라운 것은 보호수 귤나무가 자라는 집이 강성요씨와 박영옥씨 13대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온 집이라는 사실이다. 370년 된 나무들은 13대 조상이 처음으로 이곳에 터를 정할 때 심은 것들로, 집안의 모든 길흉화복을 함께해 온 반려자들이다.
강씨의 집 인근 고내봉 자락에 진주강씨 선조묘역이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보니, 이 집안사람들은 400년 가까이 조상의 묘역 가까운 곳에서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 종가의 덕목-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맞이한다)을 보람으로 이 터를 지켜온 것으로 보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