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콜센터 노동자다. 서울지하철 중에서도 '지옥철'이라 불리는 2호선 강남역 방향 플랫폼에 나는 매일 아침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선다.
지난 여름 정부는 전력대란에 대비한다며 공공기관을 비롯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장소에, 집중적으로 몰리는 피크시간대에 전기사용을 제한하는 이른바 '절전대란'을 일으켰다. 무더운 여름날, 출근시간에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고, 낮 12시부터 2시 사이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수밖에 없는 서민은 대통령이 일으킨 절전대란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바쁜 출근길 와중에도 얼굴에 '예의상' 뽀얗게 화장을 할 수밖에 없는 직장 여성인 나로서는 2013년 여름 내내 하얀 국물이 돼 흘러내리는 '화장땀'을 바짝 붙어 있는 앞 남자의 어깨에 흘려야 했다. 전력대란인지 절전대란인지 모를 그 여름날의 대란은 우리에게 평소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내 관심은 오직, '충분한 전기공급'이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있었지만, 더 이상 고등어와 참치를 마음껏 먹을 수 없다는 게 종종 회자될 뿐이었다. 핵발전소든 풍력발전소든 미친 듯이 더웠던 지하철에서 내내 생각했던 것은 '전기가 만들어주는 쾌적함'이었다.
노인 고객 전화에 까칠했던 나
숨막힐 듯 불어대는 옆 남자의 숨소리를 애써 잊으며 스마트폰을 뒤적인다.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소식도 있었고, 세계경제가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안 보인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리고 밀양에서 주민들이 송전탑 공사를 반대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나는 밀양 주민들의 고통에 무심한 만큼 나의 고단함에도 무감각해져 있었다. 하루에 받아야 할 콜 수가 늘어났고, 시급은 제자리였고, 추석선물세트는 작년보다 딱 절반 크기로 줄었다. 2분 동안 한 콜씩 받아야 목표 콜 수를 채울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사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했다. 급기야 관리자들은 통화시간이 2분이 지나면 사내 메신저로 쪽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일하는 곳은 방송 홈쇼핑 콜센터라 시골의 노인들이나 장애인들처럼 소비의 사각지대로 밀려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전화를 건다. 노인들이 전화를 하면 2분 안에 전화를 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때문에 목표 콜 수가 늘어난 뒤로 노인 고객의 전화를 받으면 나도 모르게 날카롭게 대하게 된다.
다짜고짜 "나 거시기 그것 좀 보내, 보내면 돈 줄 테니까"하며 일단 물건부터 보내라고 우기거나, 다짜고짜 "내 물건 내놔, 이 도둑년들아"라며 밑도 끝도 없는 불신의 욕지거리를 늘어놓으며 당장 물건을 내놓지 않으면 전화를 끊지 않겠다고 버티는 어르신. 또, 다짜고짜 하염없이 자신이 이 물건을 왜 반품을 해야 하는지를 늘어놓는 어르신. 어떤 어르신은 고객 정보 확인차 이름을 물어보면 주소를 말하고, 카드번호를 물으면 건너방 가방에서 뒤적거려 가지고 와서는 돋보기가 없어 엉뚱한 번호만 반복하다가 그제서야 안경을 써야겠다며 또 기다리라고 한다.
2분이 넘었다고 관리자가 보내는 전산 쪽지가 쌓이고, 하루의 목표 콜수와 점점 멀어지는 나의 실제 콜 수를 보며, 헤드셋을 집어던지고 노인 고객님께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는다. 나는 내 고통에 소리치지 않을 만큼 무감각이 내면화돼야 하는 콜센터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 늙고 느려터진 고객이 돋보기를 찾기까지 또 시간이 걸리겠지…. 기다리는 동안 스마트폰을 켠다.
느릿느릿 하지만 멈추지 않고 저항하는 할매·할배를 위해
페이스북에는 밀양에서 송전탑을 막아내던 한 노인이 음독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퍼지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와 오랜 시간 같이 살아서 안다. 노인이 됐을 때 가장 큰 소원은 곱게 죽는 것이다. 잠자다가 편안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 그런데 밀양의 노인들은 분신을 하거나 음독자살을 하며 가장 험하게 죽었고, 죽지 못하는 노인들은 죽음보다 더한 남은 생을 지독하게 보내고 있었다.
차마 죽지 못하겠다는 할매들은 웃통을 벗었다. 팽팽했던 가슴이었을 것이다. 늘어진 젖통을 출렁거리며 젊고 팽팽한 전경들 앞에 서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분명히 저 할매도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앞뒤 맥락 없이 자신의 하소연인지 비판인지 모를, 욕지거리가 대부분인 넋두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경들의 뒤에서는 무서운 속도로 송전탑이 세워지고 있었다.
돋보기를 찾은 할머니가 카드번호를 또박또박 불러주고, 늙은이가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며 말갛게 웃는다. 괜찮다고 말도 해야 하고,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최대한 기계적으로 말해야 하는데, 말문이 막혀 서둘러 끊어 버린다.
혀가 팽팽 돌아갈 정도로 정신없는 속도로 상품을 팔아대고, 봄날 죽순이 쑥쑥 솟듯이 밤새 송전탑이 쑥쑥 생기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밀양 할매·할배 들은 9년째 노쇠함이 갖는 느린 리듬을 지속하고 있다. 험하게 목숨을 내놓은 할매·할배 들의 현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밀양 송전탑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전력과 경찰 등 공권력은 모든 정보와 언론·권력을 동원했지만, 밀양은 아직도 진압되지 않고 있다. 송전탑은 무서운 속도로 올라가는데 할매들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오늘도 공사현장을 찾아 산으로 간다. 그리고 나는 '설 명절 특수를 위한 전 직원 강제 특근'을 사양하고 오는 25일 밀양행 버스를 예약한다. 한파가 몰아칠 것으로 예상되는 아침, 사람들의 온기로 꽉 찰 지하철 2호선 출근길을 뒤로하고 나는 밀양으로 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전주희 기자는 인문학 연구공동체 수유너머N 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