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양방문기①] 평상복 입은 여성에게 말 걸었더니... "경찰입니다"☞ [밀양방문기②] "우리도 카메라 있다!" 눈물이 났습니다깜빡 잠들었다가 깨보면 할머니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추수가 한창이라 농사일을 하루라도 못하는 걸 애달퍼하셨고 송전탑 때문에 엉망이 된 마을 분위기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잠결에 할머니들의 도란거리는 말소리를 들으니 오랜만에 외갓집에 온 듯한 기분이더군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할머니들은 우리가 누워 있는 그 산에도 6·25때 빨갱이들이 많았었다고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빨갱이는 지금도 많다. 빨갱이가 국회의원도 하는 세상이니 빨갱이가 얼마나 많겠노!"아마도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이야기를 하는 듯했습니다. 밀양의 첫날, 산에는 못 올라가고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모이는 금곡 헬기장에 갔었는데 통합진보당 국회의원이 오자, 그 곳에 있던 모든 기자들이 몰려가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종북'이라는 꼬리표가 애들 딱지보다 흔해진 그 즈음, 정권과 주류 언론이 밀양주민들의 송전탑 저지 활동을 어떻게든 종북으로 몰아가려고 한다는 것을 그날 금곡 헬기장에서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잠을 자면서 할머니들의 반공정신이 투철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할매들이 비닐에 밥과 반찬을 싸오는 이유
할머니들은 그렇게 농사이야기며 동네이야기, 그리고 시국에 대한 이야기까지 참 다양한 이야기를 많이도 나누셨습니다. 그렇게 날이 밝았습니다. 새벽 4시부터 깨어 있던 할머니들은 동이 트자마자 내려갈 채비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냥 남아 있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다른 두 마을 주민들이 올라오시는 거면 거기 남아서 천막을 지키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다시 그 산을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40대 초반인 제가 헉헉대며 오르는 가파른 그 산을 할머니들이 이틀에 한 번 꼴로 쌍지팡이를 짚고 오른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속이 상했습니다. 혼자 남겨질 저를 걱정하시며 몇 번이나 같이 가자고 하시던 할머니들은 결국 내려가셨고 저는 천막 안에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는 '고답마을 새댁'이라고 얘기해줄 사람도 없고 제 입에서 서울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이 고장 사람이 아니라고, 외부세력이라고, 더 나아가 빨갱이라고 할까봐 무서워서 숨은 듯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좀 높아 보이는 경찰이 와서 저보고 내려가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주민들은 오늘 산에 올라오지 않기로 했다고 하면서요. 대책위 미디어팀장에게 전화를 해보니 주민들이 한국전력 차량을 막기 위해 산 아래 길을 막았고 길에 누운 할머니들을 경찰들이 끌어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미디어팀장은 "내려오는 걸로 하고 다만 조난 당할 수 있으니 혼자서는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109 공사현장이 있는 그 산은 주민들도 길을 잃을 정도로 험하다면서요. 주민들이 연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으니 내려가는 것이 맞았습니다. 다행히 119 구조요원들이 내려간다고 해서 따라 내려갔습니다. 어제 제 옆에서 주무시던 할머니가 "올라오는 건 천천히 올라와도 되는데 다리에 힘이 없어서 내려가는 일이 더 힘들다"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만큼 길은 가파르고 산은 험했습니다.
한참을 내려가다가 어제 옷을 빌려주신 주민분을 만났습니다. 언니를 만난 듯 반갑고 괜히 서럽기까지 하더라구요.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다시 산을 올라야 했습니다. 주민들이 올라오지 않기로 했다는 경찰의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경찰이 주민들을 막고 못 올라가게 한다는 것, 그것이 진실이었습니다.
첫날 외부인이라고 저를 막았던 그 지점에서 이제 경찰은 경찰과 한국전력 직원 외에는 누구도 못 지나가게 하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조차도 자신들의 땅에, 자신들의 산에 올라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경찰이 없는 길로 올라갔던 주민 몇 명은 저처럼 "오늘은 주민들이 여기 안 올라온다"는 경찰의 말을 믿고 다시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막힌 길 그 앞에서 주민들은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앉아있었습니다. 모두들 관절이 좋지 않으셔서 파스를 나눠 붙이기도 하고 밤이며 감 따는 이야기, 아침에 경찰과 충돌했던 얘기도 하셨습니다. 한전 차량을 막기 위해서 사거리에 누운 할머니를 경찰들이 팔 다리를 들어 옮겼다며 여자경찰들 얘기를 하셨습니다. 여자경찰들이 보호하는 척 하면서 팔을 꺾거나 비틀거나 꼬집는다는 겁니다. 할머니들은 그게 너무 아프다며 팔의 멍을 보여주셨습니다.
시간은 그렇게 천천히 흘러갔습니다. 밥 때가 되자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어제 고답마을 할머니들이 그랬듯이 오늘 할머니들도 비닐에 밥과 반찬을 싸오셨습니다. 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산에 오르는 게 너무 힘들어서 통 무게라도 줄이려고" 그렇게 싸오신다고들 하더라구요.
고정마을에는 젊은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귀촌을 하셨다는 한 아저씨는 "집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송전탑이 세워진다"고 하시더군요. 정부에서는 밀양에 세워지는 765kV의 경우 피해범위가 반경 13.95미터라고 한다지만 두 딸이 어려 불안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피해가 없다 하더라도 마을 사람 중에 누군가는 피해를 볼 텐데 마을 일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어서 나왔다고 하셨습니다.
당신들한테 그럴 대우 받을 분들 아닙니다
점심을 먹고 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중년 여성분이 경찰들에게 다가섰습니다. 왜 길을 막는지, 그리고 주민이 가는 길을 막는 게 불법은 아닌지 관련 문서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현장에서는 구두 지시라도 합법이다"라며 그 분의 발길을 막아섰습니다.
그리고… 얄미운 경찰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경찰은 무서워만 했지 미워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제 삶이 안온했던가 싶습니다. 전날 밤에도 그리고 산을 올라오면서도 할머니들은 책임자급 경찰들과는 입씨름을 벌였지만 젊은 경찰들에 대해서는 안쓰러워했습니다. "느그들이 고생이다" 하시면서요.
하지만 그날 만난 경찰은 미웠습니다. 자기의 땅에서 쫓겨나야하고 자기의 땅에 가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그렇게 굴 것까지야 없지 않을까요? 그 경찰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릴 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습니다.
'당신한테 그럴 대우 받을 분들 아닙니다. 존중하십시오'그렇게 하루는 저물어갔습니다. 중간에 산으로 올라가는 한전 직원들을 발견하고 주민들이 쫓아갔지만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 그 막힌 길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뿐이었습니다. 용변을 보려고 해도 경찰들은 따라왔습니다. 정말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해가 저물어 그 곳을 떠나오며 주민 중에 한 분이 말했습니다.
"그래, 너희들이 산길은 막아섰지만 우리 동네는 못 들어온다. 내 땅, 내 마을에는 한 발짝도 들어오지 못하게 할거다 "너무 늦은 글을 마무리합니다. 109번 공사현장에서 만났던 주민 분들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을은 TV에 안 나옵니다", "우리 마을에는 기자가 안 옵니다", "잘 찍어서 인터넷 같은 데 많이 알려주십시오". 작년 가을 밀양에 갔을 때에 저는 너무 늦게 가서 송구스러웠습니다. 손바닥만한 카메라를 반기는 그 분들 안에 있으면서 '내가 이렇게 쓸모있는 사람인가' 싶어서 정말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알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너무 늦은 이 글은 그래서 너무나 송구스럽습니다.
가로막힌 산...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밀양에서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109번이 제 이름 같았습니다. 하지만 기억은 무뎌지고 저는 삶에 묻혀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 유아무개 어르신의 별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은 고정마을 분입니다. 외부세력 출입금지라고 해서 돌아서던 밀양의 첫날, 같이 산을 올랐을지도 모릅니다. 밀양의 셋째 날, 막힌 길 앞에서 밥을 같이 먹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분을 보았을 것입니다.
아니, 보지 않았다고 해도 저는 보았습니다. 그 곳에 계신 모든 분, 한 분 한 분의 상황은 유아무개 어르신이 처해있는 상황과 다르지 않습니다. 슬픔, 억울함, 분노. 주민들과 함께 있으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은 모욕감이었습니다. 처절한 어르신들의 몸부림에 "참말로 왜 이러십니까?"하며 한심한 듯 던지는 경찰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저는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경찰들이 왜 "참말로 왜 이러십니까?"라고 묻는지 압니다. 그 물음은 이런 뜻일 것입니다.
이 많은 경찰 병력을 어르신들이 뚫을 수 있을 것같습니까? 나라가 하는 일을 힘없는 밀양 주민이 막을 수 있을 것같습니까? 패배주의에 대해서라면 모르지 않습니다. 제 인생에서 그런 식의 물음은 늘 반복되어 왔으니까요. 푸른영상 동료감독들이 평택 대추리에서, 경북 영주에서, 그리고 서울 용산에서 찍어온 화면들에는 결국에는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는 주민들의 모습이 넘치도록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주민들은 결국 자기의 땅을 떠나야했습니다. 죽어서야 떠나야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그 곳에 살면서 작업을 하던 동료들은 마음의 병을 얻어 휴직을 하기도 했습니다. 패배주의는 그렇게 제게 낯설지 않은 감정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작년 10월 밀양엘 갔습니다. 며칠 촬영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그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 분들의 질문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었습니다.
왜 우리 마을에 송전탑을 세웁니까? 왜 내가 농사짓는 땅을 빼앗습니까? 왜 내 갈 길을 막습니까? 경찰이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행위를 '합법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평생을 내가 일궈온 땅에서 나가라고 하는 것의 근거가 법이라면, 우리 산에 올라가는 것을 막는 행위의 근거가 법이라면, 그 법이 잘못된 것이라고.
경찰들은 저를 외부세력이라는 이름으로 배제시킵니다. 밀양 주민들에게는 나라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합니다. 밀양 바깥에 있는 저의 생각과도, 밀양 안쪽에 있는 주민들의 생각과도 다른 국가의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국책사업이라면서 국민인 제게 물어본 적 있습니까? 국책사업이라면서 국민인 밀양주민들에게 물어본 적 있습니까? 그래서 이 글을 썼습니다. 취재기자로서가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 글을 썼습니다.
109번 공사현장으로 가는 길목이 막히던 날,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 그 막힌 길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다음 날이면 그 분들은 다시 정해진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흉년이든 풍년이든 늘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해왔듯이 거기 그렇게 계십니다.
저도 제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서 밀양에 가고 갈 때엔 꼭 몇 사람이라도 같이 가겠습니다. 혼자라도 갑니다. 갔다 오면 또 글과 영상을 올리겠습니다. 운동이나 활동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한 사람의 눈으로, 그러나 주권을 가진 한 사람의 국민의 눈으로 이 시간을 살아가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2014년 희망버스를 맞아 지난해 10월 희망버스를 타고 만났던 밀양의 풍경, 사람들에 대한 글을 씁니다. 지금은 이때보다 더 상황이 악화된 것같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 담고자하는 밀양의 상황 또한 억울하고 마음 아픕니다.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그 때 찍었던 영상과 사진들을 올립니다. 밀양에 더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가 쏟아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