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교사는 윤리학을 공부했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윤리적이지 않을까. 의외로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 게 좋다. 안타깝게도 '윤리적인' 윤리 교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윤리 교사는 교과 지식으로서의 윤리를 전달해 주는 사람이지 실천과 행동의 윤리를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법을 잘 지키는 법조인, 정도(正道)에 따라 정치를 행하는 정치인을 쉬이 보지 못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원리에서다.
반드시 윤리적이지만은 않은 윤리 교사가 가르치는 윤리 교과의 폐해는 적지 않다. 무엇보다 사람들로 하여금 윤리를 도덕 규범 정도로 생각하게 만든다. 윤리가,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 등으로 짜이는 규칙이나 규율 체계쯤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윤리가 고작 그 정도라면 한 공동체의 불문 관습이나 법률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윤리 따윈 필요 없어'라고 조롱하는 뻔뻔한 인간들이 세상에 난무하는 것도 이 때문일까.
실천윤리학의 거장 피터 싱어는 이 책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에서 이제는 고풍스럽게만 들리는 윤리 문제를 다룬다. 저자에게 윤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토대'이다. 철학적 윤리학으로 부를 만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간단하다. 저자는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새롭게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이를 통해 저자는 우리의 세계관, 곧 철학을 바꾸려 한다. 일상적인 삶의 방식을 실제로 바꿀 것을 주문한다. 일종의 실천적 윤리학이다.
어떤 삶이 윤리적일까. 타인과 협력하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떠오른다. 저자가 보는 윤리적인 사람도 그렇다. 저자는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단언한다. 저자에게, 윤리적인 삶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삶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대안이다.
윤리적으로 성찰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꼬치꼬치 따지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성찰하고 그 성찰의 결론에 따라 행동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이 책의 논리가 타당하다면 우리는 비윤리적 삶을 살 수 없으며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당하지 않아도 되는 수많은 고통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10쪽)당장 이런 조롱이 들려오는 것 같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본성을 지닌 동물인데 그런 물색 없는 소리를 하느냐, 그건 세상 각박한 줄 모르고 하는 한가한 소리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 바로잡으려 해 봐야 헛수고다, 그런 헛수고하는 당신만 바보다 등등.
언뜻 개인이 제 잇속만 챙기는 사회가 세상 본질의 실상에 좀 더 가까운 듯 보이는 게 사실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가진 다른 사람을 끝없이 시기하는 게 우리 인간의 본연의 모습에 가까워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자명한'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까지 끌어올 필요는 없으리라.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돈벌이나 소유가 우리의 '본능'처럼 자리잡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말미암은 바가 크다. 저자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주는 자본주의 이전의 인간 세상은 우리 예상을 크게 벗어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화폐불임설(貨幣不姙說)'을 통해 거래 중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고리대금이 자연에 가장 배치된다고 보았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자를 물리지 말라고도 말했다('원수 사랑'으로 유명한 누가복음 6장 35절 참조). 초기의 기독교공동체나 신앙심이 충만했던 중세인들은 모두 예수의 이런 가르침을 철저히 따랐다.
고대 그리스에서 초기 기독교 시대를 거쳐 중세 말에 이르기까지, 즉 서구 문명사의 4분의 3이 넘는 기간 동안, 돈을 버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돈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것은 특히 혹독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돈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짓은 자본주의-즉, 적어도 지난 두 세기 동안 서구 사회를 지배했으며 이제 어디에서도 적수를 찾을 수 없는 경제 형태-의 기본 조건입니다.(107쪽)저자는 인간이 이기심으로 뭉친 동물이라는 생물학적 견해에 대한 맹신도 윤리적 삶을 저해한다고 본다. 저자에 따르면, 사회적 포유류는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을 자연스럽게 한다. 또 무리를 지어 사는 사회적 동물은 좋은 것이 있으면 함께 나눈다. 부모가 헌신과 희생의 태도로 자녀를 돌보고, 친척들을 위해 애정을 아끼지 않는 것 등도 우리가 편협한 이기심에 사로잡혀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로 저자가 특별히 강조하는 내용들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은 7장 '죄수의 딜레마 벗어나기'다. 여전히 자신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래서 '윤리적인 삶이 가당키나 하냐'며 뻗대려는 이들에게 저자의 '필살기'라고 할 만한 내용이 들어 있다. 저자가 동원하는 '필살기'는 1980년대 초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액설로드가 밝혀 낸 협력의 본질에 관한 연구 결과다.
'죄수의 딜레마'는 이런 것이다. 범죄 용의자 두 명('갑'과 '을'이라고 하자)이 각각 다른 취조실에서 서로 격리된 채 심문을 받는다. 이들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부여된다. 갑(또는 을)이 죄를 자백하면 갑(또는 을)은 즉시 풀려나고 을(갑)이 10년을 복역한다. 갑과 을 모두 죄를 자백하면 둘 모두 5년을 복역한다. 갑과 을 모두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둘 모두 6개월 복역한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죄수의 딜레마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 옆방 용의자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 관점에서는 둘 다 자백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이기적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인 선택을 하면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오히려 손해를 봅니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보듯,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방안을 선택하면(각자 이기적 선택을 하면-기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안을 선택했을 때보다 더 큰 손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202쪽)액설로드는 죄수의 딜레마를 게임으로 보고, 수감 기간을 최소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게임 대회를 열였다. 1차에 14개 팀이, 2차에 62개 팀이 참여했다. 두 대회 모두에서 우승을 차지한 전략은 '첫 수는 협력한다', '그다음부터는 상대방이 방금 전에 한 대로 따라 한다'의 두 가지가 전부인 '팃포탯(Tit for Tat;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었다.
저자가, 액설로드의 연구 결과를 원용해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구사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으로 내세운 것은 다섯 가지다. ▼ 일단 흔쾌히 협력한다 ▼ 은혜를 은혜로 갚고 원수를 원수로 갚는다 ▼ 단순하게 행동한다 ▼ 흔쾌히 용서한다 ▼ 샘내지 않는다.
어찌 보면 뻔하고 쉬운 것들이다. 하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결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다. 처음 만난 상대방을 쉽게 믿기는 힘들다. 처음에 내가 협력했지만, 상대방이 뒤통수를 쳐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상을 입는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흔쾌히 용서하거나 샘내지 않는 것도 쉬운 일들은 아니다.
죄수의 딜레마와 비슷한 경우가 실제 상황에서 자주 일어날 때, 눈앞의 이익을 좇는 동물이 생존하고 번식할 가능성이 더 높을까요? 아니면 상대방과 협력하려고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는 '신사적' 동물이 더 나은 결과를 얻을까요? ··· 첫째, 모든 동물이 신사적으로 행동하는 집단에서는 모두가 좋은 결과를 얻습니다. 둘째, 모든 동물이 비열하게 행동하는 집단에서는 모두가 나쁜 결과를 얻습니다. 셋째, 일부가 신사적이고 일부가 비열하다면 신사적 동물은 상대가 비열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협력을 중단하는 한 좋은 결과를 얻습니다. (207~208쪽)저자는 위의 셋째 경우와 관련하여 '봉'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한다. '봉'은, 자신을 신사적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을 신사적으로 대하는 이를 가리킨다. 저자는 '봉'이 있으면 사기꾼이 득세한다고 단언한다. 반대로 '봉'이 없으면 사기꾼도 맥을 못 춘다. 상대가 협력하지 않거나, 상대방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모든 신사적 동물이 협력을 철회하면 비열한 동물이 등쳐 먹을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논리가 명쾌하고 시원하다. 하지만 누가 '봉' 노릇 하고 싶어서 하나. 요새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일은 전쟁과도 같다. 비정규직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파리 목숨이다. 정규직은 폭주하는 성과 압박에 시달리며 서서히 죽어간다. 편가르기의 달인들인 이 나라 정치인들 때문에 '내 편'이면서도 '네 편'인 듯 조용히 있어야 한다. 여차하면 '종북 좌빨'이니 '빨갱이'니 하는 말로 마녀사냥을 당하기 십상이다. 대선 공약 파기와 같은 비열한 '뒤통수 치기'에도 많은 시민이 침묵을 지키는 이유가 이런 데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의 논리를 다시금 찬찬히 음미해 보자. 사기꾼은 '봉'이 많을 때 득세한다고 했다. 사기꾼을 없애려면 '봉'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 뺨을 때리면 나 혼자 맞고 말지 해서는 안 된다. 저자의 말마따나 '봉' 노릇을 하는 것은 자기뿐 아니라 모두에게도 해롭기 때문이다.
맞서 싸운다고 되겠냐며 지레 포기하는 것은 사기꾼들을 도와주는 꼴이 된다. 대선공약을 줄줄이 철회하면서도 왜 대통령은 사과 한 마디 안 할까. 사상 최대·최악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터졌는데도 오히려 시민 책임을 따지는 경제수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시민이 '봉' 노릇을 기꺼이 하는 상황을 빼 놓고선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이다.
저자는 윤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보았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라고 물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일상에서의 윤리적 삶이다. 물질에 집착하고 눈앞의 이익에 몰두하는 사회에서 윤리적 인생관을 가지고 첫걸음을 내디뎌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와 직장에서 우리가 '봉'이 되지 않으려고 치는 몸부림도 그렇게 내디딘 걸음 중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이렇게 살아가는 게 정말 괜찮지 않다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